효(孝) 김재원(金在元) 김해인.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모심에 맛있는 음식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버이 죽음에 애훼(哀毁)함이 제도를 넘었으며 여묘살이 삼년을 하였다. 복이 끝난 뒤에도 매일 같이 가서 성묘하여 이웃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정한표(鄭漢杓) 참판 대임의 뒤.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모심에 그 뜻을 승순(承順)하며, 아버지 종기병(惡瘡)에 (종기를 입으로)빨아서 나았으며, 초상을 만남에 이르러 여묘살이를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을 일러 효자곡(孝子谷)이라 불렀다 한택조(韓宅祖) 청주인. 양절공 확의 뒤. 어버이 모심에 효성이 지극하고 어머니가 눈병(眼疾)에 걸려 거의 실명하게 되자 극히 정성으로 치료하였고, 또 후원(後園)에 단(壇)을 쌓고 밤이면 반드시 목욕하고 하늘에다 자신으로 대신해 달라 빌었다. 어머니의 눈이 멀자 범이 와서 어머니의 곁에서 호위하듯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한 몇 년에 눈은 다시 밝아져 사람들은 효감(孝感)이라 칭하였다. (사림들이)연명으로 문서를 만들어 포상을 청하여 급복(給復)이 명되었다 이택화(李澤和) 송파 진국의 뒤. 척암 김도화의 문하에서 수업. 천성으로 효성이 두터워 어버이 병에 단지(斷指)로 피를 드리웠고, 붕어와 살아 있는 꿩고기를 생각하자 형인 승화와 같이 단을 쌓고 호곡(號哭)하는데, 소나기가 갑자기 내려 붕어가 떨어지고 살아 있는 꿩 또한 저절로 날아 들어오기에 (음식을 만들어)드렸더니 병이 나았으며, 초상에 이르러 여묘살이 3년을 하였다 김이두(金怡斗) 김해인. 탁영 일손의 뒤. 어버이 모심에 효성이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부모님 보살핌을 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여러 해 앓자, 단을 만들고 하늘에다 빌어 끝내 평상을 회복하였다. 초상을 만나서는 곡읍(哭泣)이 끊이지 않아 향리(鄕里)가 모두 칭송하였다 김동식(金東植) 선산인. 아버지를 잘 섬겨 아버지에게 미친병(狂疾)이 있어 밤낮으로 집을 나가 달아나기에 동식은 옷을 입고 신을 신을 겨를도 없이 아버지를 추적(追跡)하였다. 아버지가 돌로 (동식의)머리를 때려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면서도 동식은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아버지를 따라가다가 뒷산의 형제바위에 이르러 떨어졌는데, 가히 십 수 길이 되었다. 동식은 갑작스레 아버지를 껴안고 같이 떨어져 이가 부러졌지만 아버지는 멀쩡하였다. 이튿날 밤 아버지가 마을 밖에 있는 신당 못에 몸을 던지자 동식은 깊이 들어가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겨우 죽다가 (아버지를)건졌다. 또(아버지가) 하양의 둔덕지에 몸을 던지자 동식이 또 구해냈다. 이와 같이 한 것이 30여년이었는데, 언제나 집 뒤에 단을 만들고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하여 아버지는 끝내 병이 나아 편안히 인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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