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밥-문리가 터지다] 도입부에 ‘기자’를 ‘(記者·현장을 기록하는 자)’라고 썼는데, 사실 나도 모르게 ‘(記者·보도자료를 기록하는 자)’라고 쓸 뻔했다. 괜스레 쓴웃음이 났다.  BBS 보도국장 전경윤 선배는 어제 나눈 카톡에서 자신은 “김훈을 닮은 인기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기자를 일러 ‘거리의 학자’라고 한 게 언론인 출신 소설가 김훈이던가.  그는 1990년대 <거리의 칼럼>으로 기자의 새로운 필법을 선보이며 소설가로 나아갈 채비를 차근차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사장된 용어지만, 시간을 쭉 거슬러 올라가면 기자를 상징하는 대표용어는 ‘민완기자’가 아니었나 싶다.  ‘민완(敏腕)’은 ‘일(과 민원)을 아주 재치있게 빨리 처리하는 솜씨’를 가리킨다.  이 용어가 새천년 전까지도 기자의 상징어로 남은 까닭은 ‘기자 끗발’이 어마무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 말 한마디면 웬만한 민원은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세상이 어느 시절엔가는 존재했었다.  내가 기자를 시작한 2005년부터 마감한 2010년까지도 기자 끗발은 엄연했다. 기사가 아니더라도 풀어내고, 풀어준 민원이 내 기억로도 적지 않다.  내 머릿속에 여적 사장어(死藏語) ‘민완기자’가 맴도는 이유다. ‘기자 끗발’과 ‘민완기자’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문제이기도 한 것인데, 아무튼 ‘무관의 제왕’이라는 기자 이칭은 그 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다.  기자사회(편집국) 내부로 보면 ‘기자의 꽃’은 ‘사회부 기자’라는 말이 있는데, 사회부 기자가 궂은일을 가장 많이 하면서 바닥 민심과도 가장 가까이 닿아 있어, 마음먹기 따라 민완기자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가 ‘강단의 고수’라면, 기자는 ‘재야의 고수’라는 말도 있다. ‘거리의 학자’라는 말과 맥이 닿는데, 교수가 한 우물을 파는 자라면 기자는 얕고 넓은 우물을 여러 개 파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기자 구실 제대로 하려면 ‘상식이 풍부한 자’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기자 구실에는 치명적인 장애가 있다. 바로 접대문화다.  기자는 기본적으로 출입처와 민원인(제보자)에게 ‘골칫거리’다. 하물며 기자가 ‘끗발’이라도 발휘하는 날에는 여간 짜증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야생마 10마리 다루는 것보다 기자 1명 다루는 게 더 어렵다’는 우스개가 나도는 것은 평소 기자 관리의 필요성 때문일 터이다. 이런 우스개는 한 번쯤 들어봤을 거다. ‘선생, 경찰, 기자가 술을 마시러 갔다. 술값을 누가 계산했을까?’ 사회생활 좀 해 본 사람들은 답변이 대략난감할 것이다.  정답은 선생도, 경찰도, 기자도 아니다. 바로 술집 주인이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다. 접대문화(술, 촌지, 골프)는 기자를 병들게 한다. ‘끗발’도 ‘제왕’도 ‘꽃’이란 지위도 극성을 떨면 그 끝은 필망이다. 세상만사가 그렇다. 극성이면 지패(極盛之敗)다.  그렇게 기자 전성시대는 저물었다. ‘민완기자’는 아스라한 추억의 단어가 됐다. 신문 구독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는 건, 우리네 읽기 문화의 척박성을 따기지 전에 병든 기자들의 나쁜 행태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신문사는 절독률의 본질을 그렇게 파악해야 한다. 이제 기자는 그냥 ‘기레기’다.  내가 ‘기레기’라 해서 ‘기레기’가 아니라 국민 여론이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기자는 ‘현장을 기록하는 자’도 ‘거리의 학자’도 ‘재야의 고수’도 아니다. ‘보도자료를 받아 쓰는 자, 자판이나 두드리는 자- 타자(打者)’일 뿐이다. 유불리에 따라 이합집산에 능통한 자일 뿐이다. ‘감각적인 기자’였던 김훈은 진작에 이 판떼기를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의 길로 훌훌 떠났을지 모른다.  작가. 작가는 ‘(作家·글로 집을 짓는 자)’란 뜻이다. 작가는 짓기 면에서는 교수와 기자의 능력을 곧잘 뛰어넘는다. 교수와 비교해 긴 글을 쓴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는 긴 글을 쓴다는 점이 확연히 다르다. 작가가 훨씬 더 매력적이다.  기자와 비교해 짧고 빳빳한 글쓰기에 길들여진 기자 필력으로는 기승전결의 긴 글을 감당하지 못한다. 기자가 작가에 못 미치는 것이다.  혹자는 교수는 부연을, 기자는 축약을 장기로 한다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글쓰기라면서 기자의 선명한 글쓰기를 우위에 두지만, 그건 코미디 같은 짓이다.  글은 디테일이 중요(생명인-)한데, 제한된 기사문에서는 그 묘를 살려 쓸 수 없다.  기성언론은 초가삼간 다 태우고(독자가 다 떨어져 나가고) 가로늦게 ‘탐사보도’니 ‘내러티브’니 ‘스토리텔링’이니 하면서 ‘섬세한 글쓰기’에 힘을 쏟고 있다. 기차 떠나고 손 흔드는 격이다. 또 혹자는 작가의 글은 ‘히매가리(힘)’가 없고, 기자의 글은 히매가리가 있다는 점에서 기자의 글을 우위에 놓는데, 역시 황당한 이야기다. 긴 글은 축약의 묘를 통해 선명성을 세울 수 있다. 또 디테일도 기사문보다는 섬세하게 살려 쓸 수 있다.   기자를 작가라고 하지 않는 것은 기사문으로는 하나의 집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자를 교수라고 하지 않는 것은 기사문으로는 이론(과 세부 검증)을 세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자가 자판이나 두드리는 타자(打者)로 전락한 순간, 기자 특유의 그 모든 장점을 일거에 상실했다. 성을 쌓기는 어려워도 한번 무너진 성을 다시 쌓기는 요원하다. 하나 이런 현실에배알이 뒤틀려도 절망할 건 없다. 방법은 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기자다운 기자’로 서는 일은 자신이 잘하면 되는 것이다.이제라도 그놈에 술, 골프 접대 그만 받고 낮에는 현장으로, 밤에는 도서관으로 달려가라. 술, 골프 접대를 특종의 처(處)라고 주장하는 기자는, 내 경험상 전부 사쿠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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