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에 가면 반남박씨의 시조 박응주(1204~?)의 묘가 있다. 그는 신라 초대 왕인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고려중엽 반남 및 영암 일대에서 행정권을 관장하는 호장(戶長)을 지냈다.
그의 묘소에는 자미산 아래 상하로 두 기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데 밑에 있는 묘소가 벌 명당으로 유명한 시조 박응주의 묘소이고 위에 것은 그의 손자 박윤무의 묘소다.
시조 묘마다 대부분 재미있는 전설이 한 둘씩 전해져 내려오지만 이 묘소에도 예외 없이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사연인 즉, 고려 말 나주지방에서 살고 있던 박의(朴宜)라는 사람은 그의 부친이 세상을 뜨자 이웃마을에 사는 지관에게 아버지가 묻힐 자리를 부탁하게 된다.
지관은 산에 올라 묘소자리를 살피던 중 명당 터를 발견하고는 너무나 큰 명당 터라 얘기하면 천기누설로 화를 입을 것 같아 조금 위쪽에다가 묘를 쓰라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박의도 풍수에 약간의 일가견이 있는지라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저녁에 지관의 집을 찾아갔다. 지관의 집에 도착해보니 마침 그는 부인과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어 우연히 엿 듣게 되었다. 부인 왈, 오늘 박호장의 묘 자리를 알아봐주었소 하니 지관은 아내에게 너무나 큰 명당이라 천기를 누설하면 내가 화를 입을 것 같아 조금 위에다 자리를 정해주었다고 했다.
박의는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산에 올라 그 아래쪽에다 땅을 파려고하고 있는데 지관이 올라와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이게 천운인가보다 사실 이곳이 명당인걸하면서 내가 고개를 넘어 집에 도착할 때쯤 땅을 파라고 당부를 한다.
그러나 작업은 계속하였고 한참 파 내려가자 그곳에서 수많은 벌들이 나와 지관이 집에 가기 전 고개를 넘을 때 머리에 벌침을 쏘아 죽었다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장사를 치른 후 박의는 지관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게 되고 크게 후회하면서 지관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었으며 그 후 지관이 넘던 고개를 벌고개(蜂峴)라 하고 아버지 묘를 벌 명당이라고 불렀다.
풍수설화에도 벌 명당에 묘를 쓰면 벌떼처럼 자손이 번창 하며 벌들이 꿀을 모으듯 재물과 명예가 뒤따르지만 기이하게도 벌 명당을 잡아준 지관은 벌에 쏘여 죽음을 맞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묘소의 음덕으로 반남박씨들은 문과 215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 등 수많은 문명을 배출하고 박세채 선생은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곳의 묘소는 혈장 뒤 자미산(45m)에서 내려온 용맥의 용진처에 위치하고 있으나 나지막한 야산에 용맥이 너무 넓게 퍼져 혈장에 생기가 집중되지 못한듯하고 혈장주변의 작은 암석들은 아직 탈살이 되지못해 땅속 지기가 그다지 왕성하지는 못한 곳이다. 묘소 우측의 백호는 혈장을 잘 감싸주고 있으나 좌측의 청룡은 약간 비주를 하고 있어 혈장의 물이 그대로 빠져 나가는 단점이 있지만, 다행히 혈장 좌우에는 저수지(丙方池⋅艮方池)가 있어 혈장의 생기를 어느 정도는 가두어주고 있다.
일부 풍수가에선 이 묘소 역시 조선의 8대 명당 중 1곳으로 꼽고 있으나 8대 명당은 학자들 마다 견해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