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烈) 유씨(柳氏) 최경제의 아내. 부도(婦道)가 있었다. 시부모 모심에 정성을 다 하였고, 남편 모심에 또한 그와 같아서 이웃과 친척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정유재란에 팔공산에 숨었다가 급기야 적을 만나도 얼굴  색을 변하지 않고 품속의 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자 적들이 놀라 달아났다. 만력 기유년에 정려됨. 정씨(鄭氏) 사인(士人) 정응기(丁應璣)의 아내. 만력 정유년 시부모와 더불어 신산으로 전쟁을 피해 갔다. 적이 갑자기 이르러 먼저 시아버지를 죽이고 또 그 시어미를 죽이려 하면서 핍박하자 정씨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의 시어미를 살려준다면 나는 장차 너희들을 따라 갈 것이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죽임이 있을 뿐이리’(라 하자)적들이 (그 말을)믿고 허락하였다. 정씨는 바로 시어미로 하여금 피해 달아나게 하고 (적을 따라)길을 간지 1리쯤에 이르러 스스로를 찔러 죽었다. 갑인년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려(旌閭)가 되었다. 김씨(金氏) 김극례의 딸. 시집가기 전에 임진난을 만나 왜적들에게 잡힌바가 되었다. 잡아서 말에 올리는데 김씨는 패도(佩刀)를 뽑아 스스로를 찔러 죽었으며,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려됨. 정씨(鄭氏) 의흥의 사인(士人) 홍성영의 아내. 고을의 서쪽 북습리에 살았는데 남편이 병으로 죽자 정씨는 한 숟가락의 물도 입에 넣지 않고 곡벽(哭?)하고 애통(哀慟)한 것이 9일에 드디어 목을 매고 죽었다. 숙종 병진년에 정려됨. 김씨(金氏) 진사 김건준의 딸. 사인(士人) 이세하의 아내. 시집에 가기 전에 남편이 천연두(痘瘡)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목용하고 하늘에 빌었다. 부고가 이르자 죽음으로 스스로 기약하였지만, 다른 사람의 구한바가 되어 거의 죽었다(살아 난 것이) 몇 번이나 되었다. 남편의 집에 이르러서는 수척함이 날로 심하여 뼈만 앙상하여 죽음이 드리웠지만 오히려 억지로 힘써 기운을 일으켜 새벽과 저녁의 곡과 아침과 저녁의 상식(上食)은 반드시 스스로 몸소 행했다. 장례를 치룬 이튿날 시아버지에게 청하여 친정집으로 돌아가, 음식을 끊은 지 6 일 만에 죽고, 숙종조 계해년에 정려됨. 정씨(鄭氏) 본적은 연일. 사인(士人) 벽진 이우협의 아내. 시집 온 지 겨우 3년에 남편의 상을 당하여, 제전(祭奠)의 도구들은 반드시 몸소 정성으로 집행하고 낮이면 슬픔과 아픔을 참으면서 늙은 시어미를 위로하고, 밤이면 몰래 가슴을 치고 피 눈물을 흘리면서 겨우 연명을 하였다. 상복(喪服)이 끝나던 날 독약을 먹고 스스로 죽었고, 영종 임진년에 정려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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