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烈)
이씨(李氏) 훈련판관 여강 이태국의 딸. 사인(士人) 안서중의 아내. 평소 효순(孝順)으로 이름났다. 정유년에 남편이 병을 만나 여러 날을 끌자, (이씨는)목욕하고 하늘에 자신으로 대신 해 달라 빌었다. 급기야 남편이 죽자 다만 곡을 몇 번 하고는 조용하게 늙은 시아버지를 위로하면서, 염습의 도구들을 스스로 점고하였다. (그리고 남)몰래 하나의 작은 종이에 유서를 써서 옷의 띠 가운데 매어 그의 자녀들에게 남겨 두고, 약을 마시고 생을 마쳤으니 곧 성복(成服)한 날이다. 정종 기해년에 급복(給復)됨
유씨(柳氏) 사인(士人) 유하극의 딸. 동몽교관으로 추증된 조광열(趙光烈)의 아내. 시집 온 지 몇 달 만에 남편의 상을 당하여 때와 날(時日)의 제도를 조용하게 처리하고, 시부모 모시기를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장례하는 날이 다가오자 스스로 빈소(靈室)에서 목을 맸다. 정종 임자년에 정려
하씨(河氏) 신녕 고을의 아전인 한응규의 아내. 남편이 죽은 뒤 수 십 년을 한 번도 빗질을 하거나 목욕하지 않았다. 일족들이 그 상복을 벗으러 권해보지만 죽음에 이르도록 상복을 입고 낮 밤으로 호곡(號哭)함이 초종(初終)과 진배없어 향인(鄕人)들이 열부라 칭송하였다. 암행어사가 중앙에 보고하여 급복(給復) 50부(負)가 명되고, 기묘년에 병으로 거적 위에서 죽었다.
손씨(孫氏) 월성 사인(士人) 손성도의 딸. 사인(士人) 안영중의 아내. 시집 온 지 몇 일 만에 남편의 초상을 당하여 고복(皐復)하던 날 크게 몇 번 울고는 그치고, 조용하게 시부모에게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라 달랬다. 염습에 쓰이는 모든 도구들을 몸소 바느질하며 말하기를 ‘내 남편을 위해 옷을 깁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리’(라 하고는)행동거지가 평소와 같았다. 그날 저녁 몰래 남편의 허리띠를 취하여 동심결(同心結)을 만들어 스스로 목을 매어 (남편의)시신 옆에서 죽었다. 사림들이 그녀의 열행(烈行)을 표하기 위해 여러 차례 감영과 고을에 글을 올렸다
최씨(崔氏) 사인(士人) 익찬의 딸. 사인(士人) 손붕구의 아내. 나이 17세에 남편이 병이 있어, 아침저녁으로 하늘에 발어 자신으로 대신 해 달라 청을 하였다. 급기야 남편의 초상을 당하여 염습하는 도구들을 친히 스스로 재봉(裁縫)하며 시부모 모시기에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성복하던 날 시아버지에 청하여 말하기를 ‘남편이 죽어 자식이 없으니 양자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라 하고는 일족의 아들을 양자로 삼고 약을 마시고 남편의 빈소에서 죽었다. 고을과 도(道)의 사림들이 여러 번 감영과 고을에 글을 올렸다
최씨(崔氏) 사인(士人) 박천억의 아내. 시집 온 지 5달에 남편이 병으로 죽자, 이미 염습을 마치고 드디어 굶어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려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