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9) 미주가 다녀갔다. 온다고 했을 때 헛헛한 마음이 채워진다는 기대감에 순순히 허락했지만, 지금 더할 수 없이 혼란함만 엎질러놓고 간 꼴이 되었다. 이미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깨어진 항아리처럼 수습불가로 치닫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남편의 전화를 받고 둘러댈 이유는 천 가지가 넘는대도, 굳이 곧이곧대로 ‘애인 집’이라고 말하는 정도면 안 봐도 비디오였다. 긍정적이었던 미주의 성격을 무엇으로 자극했기에 분노유발자로 옮겨 탄 것일까.  온통 심란하여 베란다로 나갔다. 먹이를 쫒아 뒤뚱거리는 청둥오리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공사로 파놓은 구덩이에는 봄과 겨울을 교차하는 삼월바람이 한 번씩 똬리를 틀고 있었다. 청둥오리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떼로 몰려왔던 그날, 남쪽에서 겨울을 난 철새들은 러시아로 가기위해 인사차 들렸던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놓아둔 잡곡쌀이 청둥오리를 기다리는 듯 햇살에 반짝거렸다. 이제 따로 잡곡쌀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시원섭섭했다.  미주의 전화벨이 울렸다. 네 시간 전에 떠난 미주의 전화벨에서 등골이 오싹한 소름이 감지되었다. 왜일까. 잠시 멈칫멈칫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울음소리만 한가득 들려왔다. 단지 전화벨소리에 소름이 돋은 나를 달래며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래? 싸웠어? 울지 말고 무슨 이유인지 말해봐. 도움이 필요해? 오빠가 갈까?” “응! 오빠가 꼭 와줘야겠어.” “집이야? 어디야?” “집이야. 금방 와줘. 부탁이야.” 울음을 삼키면서 내뱉는 미주의 다급한 목소리에 맞춰 웃옷을 걸치지 않고 뛰어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후다닥 주차장으로 뛰어가 시동버턴을 눌렀다. 햇살이 기우는 통로를 따라 지하주차장에서 벗어나 삼십분 남짓 달려 미주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칠층 버턴을 누른 엘리베이터는 수직상승의 승차감을 안겨주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형색이 엉망인 미주가 문을 열어주었다.  “남편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전화벨소리에 느꼈던 소름이 쿵쾅거리는 두려움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욕실 문을 열었다. 바닥에 튄 핏자국과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세면도구와 널브러져 흰자위가 보이는 남편은 짐짝처럼 욕조 속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 황당하고, 괴기스런 장면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리라고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거저 치고받는 부부싸움정도이거나 남편은 뛰쳐나가고 이혼한다는 하소연정도로 추측한 내가 무색할 만큼 소용돌이 속에 들어와 있었다.  “미주 너, 미주 너, 무슨 짓을 저질런거야!” 맥박이 잘 만져지는 목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맥박은 커녕 싸늘하게 식어있는 체온만 만져졌다. 허긴 눈을 까집다시피 부릅뜨고 흰자위를 드러낸 몰골에서 쉽게 상황파악은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는 이미 버틸 힘을 남겨두지 않았다. 머릿속은 백지상태이며 거실에서 울고 있는 미주의 울음소리만 귓가에 찰랑거렸다.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샤워기를 틀었다. 차가운지 뜨거운지 모를 물줄기가 샤워기 구멍을 통해 쏟아져 내렸다. 옷을 입은 채로 듬뿍듬뿍 적셔지고 있었다. 뚝뚝 주먹만 한 물을 떨어뜨리며 거실로 나와 미주 옆에 앉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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