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烈) 김씨(金氏) 사인 조도승(曺道承)의 아내. 부도(婦道)가 있었다. 급기야 남편의 병에 손가락을 찧어 피를 드리웠고 이미 죽음에 울며 말하기를 ‘내가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음으로)천지신명(天地神明)의 뜻을 어김은 하늘이 이미 바라지 않겠지만, (나의)삶이 온전함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위로는 늙은 어버이가 계시고 아래로는 어린 자식이 있으니 봉양하고 기르는 도리과 집안을 보존하는 책임이 어찌 나에게 있지 않겠는가?’(하고는) 드디어 그 아픔을 머금어 참으면서 시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가르쳐, 마침내 그 가문을 이루어 이웃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서씨(徐氏) 사인 정한헌(鄭瀚憲)의 아내. 시집온지 4년에 효(孝)로 알려졌다. 시집가던 날 남편이 급한 병으로 죽어 부고를 받들고 울면서 (남편의 죽음을)알리자, 친정아버지가 달래신다. 바로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고 염습의 도구들을 친히 스스로 재봉(裁縫)하고 제전(祭奠)의 쓰임을 먼저 헤아려 갖추어 완비하였다. 장례일 4일을 앞두고 남편의 허리띠로 스스로 빈소의 곁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도백(道伯)과 암행어사가 모두 포양(揚)하였다. 최씨(崔氏) 본적은 경주. 말양 박정환의 아내. 시부모 모심에 효성으로 하였고, 남편이 병이 들어 장차 죽으려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웠다. 이 사실은 풍화록에 실려 있다 서씨(徐氏) 사인 조병도(曺秉道)의 아내. 남편이 시증(時症)99)으로 장차 운명하려 하자 손가락을 찧어 피를 드리워 이튿날 아침에 살아나 육즙(肉汁)을 원한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몰래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그것으로 (육즙을 만들어)주었다. 사림은 그녀의 열(烈)을 장하게 여겨 관청에 글을 올린 여러 차례의 포양(揚)한 글이 있다  이씨(李氏) 사인 서석규의 아내. 남편의 병에 실신(失眞)하였고 단(壇)을 쌓아 하늘에 빌기를 비와 눈 추움과 더움을 피하지 않고 4년을 한결 같이 하였더니 꿈에 천신(天神)이 말하기를 ‘네 남편의 병이 차도가 있으리라’(고 하였는데) 과연 (꿈을 깨고 보니) 나았다 손씨(孫氏) 사인(士人) 경주 김범채의 아내. 시집 간 지 오래지 않아 남편이 병으로 죽자 정성으로 장례와 제사를 지냈으며, 이미 졸곡(卒哭)을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양씨(楊氏) 본적은 청주. 사인(士人)인 경태의 딸. 이병규의 아내. 평소 효순(孝順)으로 알려졌다. 남편이 등에 부스럼(背瘡)이 나자 (양씨는 입으로)그 고름 빨아내기를 몇 달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아 끝내 (남편의 등 부스럼이)나았다. 고종 갑오년에 남편이 동학란에 연루되어 장래를 헤아리지 못하여, 양씨는 피로 글(血書)을 써서 진정(陳情)하여 즉시 방환(放還)하여 고을과 도의 사림들이 포상(褒狀)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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