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력을 보고 금성출판사 지면을 내준 건 유현이 누님이다.
최근 현이 누님과 통화를 했더니, 28년 근무한 금성출판사에서 퇴사한 지 꼭 1년 됐단다. 몇 년 전부터 번아웃이 왔더란다.
누님은 (든든한 부군 덕에) 1년 쉬다가 며칠 전 좋아하는 일본 배낭여행을 떠났다.
12월에 귀국하면 서울서 윤용섭 선배와 셋이 회동하기로 했다. 수년 만이다.
엊그제 대전 동구 명소 ‘옛터민속박물관(관장 김재용)’에서 조한희(한국자연사박물관장, 충남 공주 소재) 신임 한국박물관협회장의 축하자리가 마련됐다.
대구 수박물관 이경숙 관장의 주선으로 만난 옛터민속박물관 김재용 관장은 점심식사 중에 핵심을 콕콕 집는 이야기를 몇 가지 해주었다.
박물관 내 한정식당에 걸린 소나무 그림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면서 “화가도 가난하지만 죽을 때까지 화가만 하겠다는 사람에게 후원을 해주어 그림을 그리게 해야 한다. 그런 화가는 반드시 성공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나는 전국에서 모인 박물관장 10여 명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김재용 관장이 시간에 쫓겨 미처 소개해주지 못한 박물관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옛터민속박물관 아담한 전시실에는 빛바랜 도록 10여권이 원목책상 위에 놓여 있다.
인사말을 훑어보니 2006년부터 근 10년간 매년 1권씩 낸 도록이었다.
이곳엔 여느 박물관처럼 박물관 소개 팸플릿이 없다.
김재용 관장이 점심을 먹으며 한 이야기- ‘소나무 그림만 평생 그리다 죽은 그 화가 이야기’는 다름 아닌 본인 이야기도 되는 듯싶었다.
그는 구태여 문자로 많은 걸 설명해 놓지 않았다.
그는 강단과 재기 넘치는 행동파다. 묵묵히 어떤 일을 수행하는 수행자 쪽이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누구 하나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민속유산들을 갖고 대전의 명소로, 전국의 명소로 발돋움시킨 비결은 그저 하나일 듯싶었다.
‘했다. 계속해서 했다.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다.’
구수한 말투에 달변인 그는 소나무 그림 전에 이런 이야기도 했다.
“오래된 물건을 보유한 박물관은 어디를 가나 특유의 기운을 내뿜고 있죠. 그게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말씀하신 우리의 얼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곳 옛터민속박물관은 우리 얼이 스민 곳이죠. 제겐 이 유물들이 보물입니다.”
두 이야기를 가만 듣다가 옆에 있던 김 관장에게 말했다.
“관장님, 제가 그렇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글만 쓸 거거든요. 저는 글쓰는 게 너무 좋습니다.”
내 마음속엔 어떤 확신이 이미 10여년 전에 들어와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꼿꼿이 서 있다.
이른바 책신(冊神)이 들어선 것이다.
나는 나아졌고, 나아지고 있다.
나는 내 진전을 느낄 때마다 어려울 때 도움주었던 분들을 새삼 상기한다.
오늘은 내 20~30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내 차(茶) 스승 양보석 선생님과 내 의형제 박천수 형님을 만난다. 모두 수년 만이다.
이것이 올해 마지막 외출이다. 나는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내년 2월까지 더듬기만했던 <경북정신사> 집필에 들어간다.
<경북정신사>가 기대되는 건 내년 3월 불교방송과 함께하는 <백용성 스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손병희, 김구, 한용운, 선학원, 대각사, 정읍, 죽림정사, 법륜 스님, 동화사, 윤학조 스님, 지우 스님, 용화사, 지봉 스님 등 숱한 인물과 장소가 날아다닌다. 내 머릿속을 유영한다.
/심보통 202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