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교(2)
고즈넉한 저녁향기는 바다 한 귀퉁이를 강타하고, 채 영글지 않은 열여덟 살 가슴에 눅진하게 자리했습니다. 아셨나요? 막연하게 바다 앞에 서면 인간이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아셨나요? 초라한 인간을 붙잡고 세상을 헤쳐 나갈 담대한 포부를 품고 싶다고. 바다여, 항시 거치적거리던 반항과 열정사이에서, 우울과 몽상사이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나의 열여덟 살이여. 가슴은 진정되지 않은 채 두근거립니다. 햇살이 다녀간 방파제 가득 먼 곳의 소금바람이 부딪힙니다. 파도소리 요란합니다.
석양은 떼죽음으로 바다를 물들입니다. 백사장을 뒤지던 갈매기기가 밤바다를 항해합니다. 잔물결을 타고 나직하게 비린내가 코끝에 닿았을 때 등대불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네온사인이 불을 밝힌 바닷가주변으로 사람들이 찾아듭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혼자입니다. 바다가 어둠에 침묵하고, 파도소리가 절절하게 주변을 장악하고, 무심한 갈매기 솟구쳤다 추락하고, 깜깜하게 잠긴 지평선 너머에 이따금 햇살 방울이 터져 나오고, 백사장과 맞닿은 언덕바지에 송진가루가 날리고, 속 깊은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짠물을 떠먹여 키운 야행성 물고기가 튀어 오르고, 세월에 의지해 흘러간 섬들이 마른 울음을 울고 있습니다.
춥다며, 자신에게 속삭였습니다.
그러자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백사장을 지나 바람방향으로 기울어진 언덕 위 소나무사이에 몸을 접었습니다. 한결 살만했습니다. 한쪽 날개를 늘어뜨린 갈매기가 인기척에 놀라 상처 입은 잰걸음으로 달아났습니다. 날짐승이 날지 못한다면 얼마 뒤에 들짐승의 먹이가 되겠지요. 날짐승은 날아야하고 들짐승은 달려야만 생목숨을 보장받겠지요. 자연의 엄숙한 순리에 기꺼이 순종하라 합니다. 은폐된 몸뚱어리가 한결 누그러졌을 때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추임새처럼 백사장에 우뚝한 생명체가 포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환영 같았고 스스로 놀라 상체를 일으켰습니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고요하며 한없이 맑은 어둠의 속살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는 밤하늘 갈매기 날갯짓에 넋을 빼앗긴 것처럼 고개를 젖히고 있었습니다. 서너 발짝을 남겨놓았을 때 생명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또래의 여자였습니다. 여자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일탈을 꿈꾼 동조자 같았습니다.
“딱 봐도 가출한 것 같네. 며칠 째야?”
여자는 대뜸 반말을 했고 약간 주눅이 들은 나는 차마 반말로 응수하지 못했습니다.
“첫날인데요. 돈도 없고 추워서 그런데 하룻밤 묵을 곳이 없나요?”
여자는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젖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무인도에 버려진 이 적막감에서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행여 달아날까, 억지라도 쓰고 싶었습니다. 최대한 눈물 젖은 목소리로 모성애를 자극하기 시작했습니다.
“누나, 개집도 상관없으니 하룻밤에 빈속을 달랠 라면 한 그릇,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평생 주인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여자는 계속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입가는 웃음을 배여 물었습니다.
“저리가! 난 삼일 째야. 어제까지 대합실에 자고 오늘은 어디 갈까 궁리중인 내게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