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란 집 한지붕 아래 사는 영화와 책은 가깝고도 먼 이웃이다.
영화는 표를 끊고 두 시간쯤 앉아 감상하면 된다. 책은 적게는 두 시간에서 많게는 며칠씩 읽고 사색한 뒤에야 그 문화적 행위가 종료된다.
책은 영화보다 인내를 더 요구하는 문화행위인 것이다.
알려졌다시피 우리나라 독서율은 매우 낮다. 이웃나라 일본에 비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수준이다. 그럼에도 둘이 가까울 수 있는 것은 둘 다 교양인의 문화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이웃의 속을 들여다보면 참 놀라운 현상이 발견된다. 바로 영화와 책을 대하는 우리 국민의 자세가 극명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국민의 국내영화에 대한 사랑은 순애보를 넘어 스토커 수준인 반면, 책은 국내저자의 출판물에 영 인색하다는 것이다.
영화의 사정은 시사회장을 가보면 당장 알 수 있다. 한국영화 시사회장은 늘 만원이다. 영화의 질적 측면과 무관하게 그렇다. 반면 외화 시사회장에는 객석의 반수가 차면 선방한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영화 관객몰이의 첨병인 영화담당기자들의 행태가 놀라우리만치 저급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영화는 개봉 전에 시사회라는 장치를 통해 사전 흥행몰이에 나선다. 이때 기자들은 작품 리뷰부터 감독, 배우 등을 띄워 미래 관객에게 먹잇감으로 선사한다. 그런데 이 장치는 국내영화에만 잘 먹혀든다.
왜 그럴까. 한국영화의 질적 성장이란 명분에도 불구하고 시사회란 장치 속에는 적어도 모종의 결탁이 숨어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우수한 외화에 대한 사전 리뷰는 물론 전반적인 외화에 대한 리뷰는 한국영화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되게 적게 다루어지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 영화시장은 전체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뿌리내려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책은 요즘 대형서점을 가보면 출판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눈에 띄는 코너에는 어김없이 번역서가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판매량으로 고스란히 이어질는지는 별도의 통계를 내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눈에 쉽게 띄는 곳에 있는 책이 잘 팔릴 확률이 높다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별도의 섹션을 마련해 놓고, 광고판을 부착해 놓을 리 없지 않겠는가.
책을 다루는 기자들의 자세는 영화를 다루는 그것과는 또 다르다. 주말에 소개되는 신간의 톱기사로 번역서가 곧잘 오른다. 컬러면 톱이나 흑백면 톱이나 번역서가 강세다. 이 점에 관해서는 영화와 같으면서도 다른 분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번역서의 양적, 질적 향상이 매우 두드러졌다. 주로 일본어로 번역된 서적을 중역해 국내에 소개하거나 일부분만 발췌해 소개하던 번역시장이 국가의 양적, 질적 향상과 함께 세계화 시대에 어깨를 맞추어가면서 엄청나게 도약한 결과다.
영어, 일본어 같은 친숙한 번역물 외에도 제3국의 언어로 직접 번역해 시장에 내놓는 시대를 맞은 것이다. 이에 따라 생소했던 내용물의 번역서들이 봇물을 이루면서 번역서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둘째는 책은 영화보다 지적 산물이란 생각이 짙다. 지적 호기심이 강한 국민은 새로운 내용의 번역물에 몰입될 공산이 크다.
나는 번역시장의 사정이 좋아져 다양한 번역물이 풀리는 상황에서, 국내 독자의 지적 호기심이 왕성해지면서 요구에 따른 번역서가 많이 소개되는 전이가 머지않아 나타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셋째는 번역서에 관한 새로운 발견이 언론의 조명을 채근한다. 우리가 어릴 때 봤던 세계문학전집은 ‘짝퉁’이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장발장 이야기를 다룬 <레 미제라블>은 웬만한 끈기를 갖지 않고는 읽어내기 힘든 분량(총 5권)이었음이 최근에서야 드러났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역시 완역본은 6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었음에랴 우리들 국어 선생님이나 문학 선생님은 알고 있었을까.
그런데 이런 분석을 근거로 하면, 우리 국민은 영화와 달리 책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전체주의적 성향에 빠져 있다는 혐의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대주의라는 올가미에 걸려든 형국이라는 께름칙한 평가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문화라는 한지붕 두 이웃은 겉은 같지만, 속은 이만큼이나 다르다. 이것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할 계제는 아니지만, 생각해 볼 거리는 되지 않을까. 부러 쓴 이유다.
/심보통 2012.11.22 짓고, 2022.11.22 나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