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A어린이집 앱 알림장에 <도덕적 감수성에 대하여>를 올린 것은 오전 7시 50분이었다. 어린이집은 해당 글이 올라가자마자 긴급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1시간 30분 동안 원장, 작년 원감, 신임 원감, B선생이 모여 글을 정독하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상의했다고 한다. 원장이 대표로 사과문을 올린 것은 오전 9시 30분쯤의 일이다. 네 가지에 대해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를 전해왔는데, 그 사과문은 진정성이 빠져 있었다. 나는 그 사과문을 훑으면서 ‘착한증후군이 만연한 대한민국의 병폐’의 단면이 읽혔다. “죄송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도 쉽게 하고, 듣게 되었다. 그러나 말의 빈번함은 거꾸로 말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진정성도 없으면서 ‘무늬만 죄송함’은 왜 표현할까. 어느 시점부터 왜 이런 모순이 생겨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쓸데없이 “죄송합니다”를 내뱉는다. “죄송합니다”의 감추어진 이면에는 ‘착한증후군’ 같은 정신병이 자리해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고맙습니다” 남발도 마찬가지.) ‘착한증후군’은 괜한 분란을 더 일으키지 않겠다는 의도적 행동이다. 그 행동은 시나브로 ‘도덕적 우위’를 점한다는 착각을 낳는다. 사과를 먼저 하는 사람은 선(善)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선(次善)이거나 악(惡) 되는 듯한 착각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이 ‘착한증후군’을 이고 안고 살아간다.  ‘착한증후군’의 본질은 ‘면피 사과’이다. 대개 순간 위기 모면용이다. 이러면 대개는 ‘사과받았으까’ 하고 넘어간다. 실은 ‘기만 사과’인데, 그걸 그러려니 넘기는 것이다. 내가 원장의 사과문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것은 ‘면피 사과’ ‘기만 사과’ ‘사과를 위한 사과’라는 게 단박에 읽혔기 때문이다. 또 참 “상식 밖의 사과”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감 선생’한테 편지를 썼는데, 답장은 ‘원장’이 보내왔다. 말인즉슨 원장은 기본적으로 원감을 비롯해 그 어떤 선생도 신뢰하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원장의 ‘완벽증후군’이 읽히는 대목이다. ‘증후군’은 정신질환이다. 정신질환은 정작 ‘중심 멘탈’이 없을 때 생기는 병이다. ‘중심 멘탈’은 자기중심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자기중심이 있는 사람은 사리 분별이 명확하다.  나는 그 어린이집 청일점인 신임 원감의 입장이 궁금했다. 통화를 했다. 90% 정도는 통했고, 10% 정도는 끝내 불통이었다. 사과를 받는 쪽 입장(학부모)을 배려한 사과보다 자기네(어린이집)가 하고 싶은 사과를 함으로써 10%의 불통이 생겨났다. ‘사과의 간극’이다. 50분간 대화를 했는데, 나머지 10%는 원감의 재량도 아니거니와 “원장과 상의를 하겠다”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전향적인 답을 듣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원감과 통화면서 원장과 같은 “치명적 결함”을 발견했다. 원장은 ‘완벽증후군’처럼 보이는 ‘불신증후군’이어서 충분히 원감이 잘 처리할 수 있는 일을 크게 벌린 뒤에야 뒷수습에 나섰고, 원감은 자기가 ‘불신증후군’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감과 B선생은 공히 ‘사회인’인데, 그 의미를 전혀 간파하고 있지 못했다. 사회인이란 조직에서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녹을 먹는 사람으로, ‘직장인’이란 뜻이다. 직장인은 단순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사안별 처신에 대한 종합적 결과로 월급을 받는 것이다.  그 점을 원장은 ‘불신증후군’이어서 아랫사람에게 재량을 주지 않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고, 원감은 일상적으로 ‘불신증후군’에 길들여져 무엇이 문제인지 인지를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스스로(力)’를 주문하면서, 원감과 B선생은 아주 간단한 일도 ‘스스로’ 할 생각을 내지 못했다. 아이들보다 못한 어른이 ‘선생’이라고 앉아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습기 짝이 없고 한편으로는 아주 서글픈 일이다.  왜 선생은 자기 잘못에 대해 스스로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못할까. 사회인은 자기 잘못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닌가. 나에게 모욕을 준 B선생은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원장이 대신 사과함으로써 ‘사과의 예’를 다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원장의 사과보다 중요한 것인 B선생의 사과라고 보았다. 그게 그의 ‘스스로(力)’ 향상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나는 끝내 이 단순한 ‘당사자 사과’는 받지 못했다. 내가 원장의 사과가 ‘겉치레 사과’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죄송합니다’ ‘착한증후군’ ‘면피 사과’ ‘기만 사과’ ‘사과를 위한 사과’ ‘완벽증후군’ ‘중심 멘탈 부재’ ‘사과의 간극’ ‘불신증후군’ ‘자조(自助)의 실종’….  대한민국 조직은 대개 이렇게 병들어 있다. ‘지랄병에는 약도 없다’는 말이 떠올라 써늘한 아침이다.           /심보통 202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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