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가면 이조 말 정권의 실세 흥선대원군의 묘소가 있다. 이 묘는 원래 1898년에 경기도 고양시에 있었으나 1906년 고종의 황명으로 경기도 파주시 운천면 대덕리로 옮겼다가 1966년 4월 다시 지금의 남양주로 이장해왔다. 경기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된 이 묘역을 흥원(興園)이라 하는데 조선 시대에는 사람이 죽어서 들어가는 무덤이라도 그 주인의 지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하여 불렀다. 능과 원은 모두 왕족의 무덤이지만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으로, 임금의 부모나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세자 내외의 무덤을 원(園), 나머지 모든 무덤들은 묘(墓)라고 불렀기에 흥선대원군의 무덤은 왕의 아버지자격으로 흥원(興園)이라 부른다. 이 묘역은 조선시대 능원제도(陵園制度)를 따르는 듯 규격에 맞게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 주변에는 기와를 얹은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져 있다.  무덤 앞에는 원(園)이라는 무덤의 격식에 맞추어 석양을 밖으로 향하게 배치하였으나 1907년 이후에 위치를 변경한 것이다. 이 무덤의 각종 석물들은 조선 왕실에서 마지막으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왕실 무덤의 마지막 계보를 잇고 있으며 근대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우수한 석물들로 학술적 의의가 크다. 대원군은 영조의 현손이며 남연군의 아들로 헌종 9년(1843)에 흥선군에 봉해졌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정치 근절, 서원철폐, 세제개혁, 대전회통 등의 법전완비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밖으로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서양세력의 접근에 대해서는 천주교 탄압과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통상요청을 거부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는 프랑스군과 미군이 강화도로 쳐들어오자 그들의 침략을 무력으로 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근대 문명의 수용이 늦어졌으며 집권 후반기 섭정 10년차에는 며느리인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대립하게 되어 정치에서 실권을 잃고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 하였으나 청나라에 강제 납치되어 천진에 4년간 갇혀 지내기도 했다. 그의 개혁 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차차 외세의 침략이 심화되어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게 되었다.  흥선군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를 충남 가야산자락의 ‘2代天子之地’에 옮긴 덕택으로 대원군에 오르고 한때는 삼천리강산을 손안에 쥐고 호령했으나 죽어서는 2번이나 이장을 당하는 불운과 더불어 남양주의 현재 묘소도 그리 길지로 보이지는 않는다. 좌청룡은 그런대로 갖추었으나 우백호가 감싸주지를 못해 바람의 피해가 우려되고 내룡맥은 혈장뒤편의 용맥이 솟구쳤다가 흘러내려가는 과맥(過脈)상에 쓰여 져 있다. 과맥에서는 기가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흘러가는 곳이고 고서에서도 ‘過龍之葬三代內絶香火’라 하여 이러한 곳에는 후손이 귀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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