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 라온이는 특이하게도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공원의 놀이기구보다 할아버지 할머니들 즐기는 운동기구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어제 오후 아내의 지령(!)에 따라 라온이를 데리고 공원 놀이터로 갔는데, 다섯 살 라온이가 어느새 아빠 손을 빌리지 않고도 운동기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을 보고 적이 놀랐다. 농구공도 처음으로 갖고 놀았는데, 또래에 비해 키가 큰 라온이는 패스도 곧잘 했다. ‘이 녀석 어느새 이렇게 자랐대.’
육아휴직 중인 아내는 두 아들 라온이 바론이를 얻지 못했다면 알 수 없었을 진귀한 경험 덕에 “이 아이들이 없었으면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를 연발한다.
그런 아내가 라온이가 다섯 살이 되자 ‘교육’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라온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다섯 살 자녀를 둔 엄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아이 교육에 돌입했다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포착됐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그것이 참 기기묘묘하게 보였다.
누구 엄마는 누구를 발레학원에 보낸다 하고, 누구 엄마는 누구를 수영장에 보낸다 하고, 누구 엄마는 누구를 태권도학원에, 실내축구장에 보낸다고 한다는 거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파트에 라온이랑 동갑내기 아이도 영어과외를 시작했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것 같다.
라온이도 축구장을 보낼까, 수영을 시킬까 하는 의견을 낸 것은 아내였다. 나는 일언지하에 “아직은 이르다”며 자유롭게 두라고 했다. 듣자 하니 라온이 반 친구들만 해도 다수가 ‘엄마 교육’에 돌입했고, 소수만이 ‘엄마랑 교육’에 머물러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훅하고 치고 들어온 아이 교육 문제에 적잖이 당혹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심히 넘길 수도 없는 것이어서 가만가만 생각이란 걸 해봤다.
이왕 시작되는 교육이라면 당장 발레, 당장 수영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며칠 전에도 아내는 또 한 번 축구 얘기를 꺼냈다. 레슨은 무료라며. 무료레슨이라도 한번 받게 하는 게 어떻겠냐는 거였다. ‘얘네 세상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일 것인데….’
나는 라온이 바론이를 뒷날 아프리카로 보낼 생각까지 하고 있다. 뜬금없고 우스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매우 진지한 고민이다. 한번 들어보시라.
4세에 한국전쟁을 겪은 1947년생 내 어머니와 전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그리고 부모가 된 1970년대생의 교육방식과 목적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선 정신이 혼미하다.
공부 잘해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은 전 세계 유례없는 대한민국만의 독특한 현상이었다. 40년간의 일제강점기, 해방 후 치열한 이념논쟁 끝에 두 동강난 남북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 20세기 한국의 전반(1905~1960)은 지배와 전쟁 그리고 폐허로 축약된다. 그리고 20세기 한국의 후반(1970~1996)은 고도의 압축성장으로 대변된다.
한국은 박정희 집권 18년을 포함해 30년 내내 10%대 경제성장률을 유지했다. 이때는 4년제 대학만 나와도 취업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입사만 해도 승진이 보장되고, 조금 더 열심히 하면 임원도 보장됐다. 공부를 더 잘해 소위 SKY를 나오면 사다리를 타고 신분상승도 꾀할 수 있었다. 이때는 공부가 전부여도 좋았다.
가부장적 질서 속에 아버지는 자녀 교육을 명분으로 매를 들고 뺨을 후려쳐도 좋았다. ‘교육은 선생님께’를 당연시 여겼던 그때, 선생들은 뻑 하면 ‘줄빠따’에 운동장 뺑뺑이를 돌렸다. 그래도 문제삼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의 구타는 물론 선생의 구타도 ‘사랑의 매’로 둔갑하던 시절이었다. 그건 사회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건드리면 큰일나는 문화유산 같은 거였다.
좋은 대학 들어가면 모든 게 추억으로 갈음되는 시절이었다. 고속성장기 대한민국은 우후죽순으로 세포분열이 일어났다. 기업 세포분열이었다. 일자리는 차고 넘쳤다. 성장을 예견할 수 있었으니 일자리도 충분히 늘릴 수 있었다.
2021년 오늘, 우리는 그때를 일러 ‘아, 옛날이여’라고 한다. 그런데 웃기다. 말로만 ‘아, 옛날이여’다. 저성장에 머물러 있은 지가 10년이 넘었고, 대학 문을 나오자마자 실업자가 되는 세상에, 인구구조는 피라미드형에서 종형을 거쳐 방추형으로 가는 게 뚜렷한데도, 아이들 교육은 아직도 1947년생 부모처럼, 1950~60년대생 부모처럼 하고 있는 것이다.
/심보통 202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