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인으로서 주인 노릇을 할 줄 아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 법을 깨치면 3불이 아니라 3불 할애비가 와도 흔들릴 까닭이 없습니다.
내 삶의 주인으로서 주인 노릇을 한다는 것은 인생의 판을 스스로 짤 수 있다는 자신감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버렸지 직업을 버린 것이 아닌 한 자기 실력과 경쟁력이 있으면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실력과 경쟁력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느냐. 그건 바로 남과 경쟁하지 않고, 자신과 경쟁하며 근면성실하게 수련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후에 복(福=행운·기회)을 기다리면 오지 말라 해도 오게 돼 있습니다.
요즘 궁고재에서 제가 특별히 관심을 두는 책은 대전에서 처음 살던 아파트 재활용쓰레기분리수거장에서 주운 책들과 두 번째 아파트인 지금 집 쓰레기장에서 주운 책들입니다.
저는 기자 시절 조선시대로 치면 고관대작의 서재를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그걸 몇 년 해 보면 양서를 보는 눈이 생깁니다.
동시에 상대가 전시용 책을 가져다 놓았는지, 그러니까 짝퉁 독서가인지, 진짜 독서가인지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건 생각해 보면 정말 섬칫한 얘기입니다.
아무튼 그런 안목을 갖고 쓰레기장에서 주워 모은 책이 한 200권은 됩니다. 작년에 누군가 이사 가면서 버린 두 박스는 온전히 제 서재로 왔습니다. 독서 내공이 만만치 않은 분의 소유였지만 이제 이건 제 소유가 됐습니다.
독서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남의 이야기를 통해 지식 나부랭이나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채우다 보면 각성(覺醒)이란 게 일어나게 되고, 각성이 생기면 지혜란 게 생겨납니다.
마치 불교의 핵인 ‘자리이타 자각각타(自利利他 自覺覺他)’를 경전 읽기로 각성한 뒤 수행과 자비(실천, 봉사)를 통해 지혜를 얻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독서는 불교와 같이 남을 보는 게 아니라 오로지 나를 보는 것입니다. 누가 알려주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터득하는 것입니다.
지(知)가 쌓이면 지(智)가 터져 나옵니다. 이건 앎의 틀림없는 이치입니다.
동양철학과 동양의학에선 인간의 생(生)이 3단계로 나아간다고 합니다. 신체리듬-감성리듬-지성리듬입니다.
신체리듬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하는 단계, 감성리듬은 물욕·성욕·재욕이 일어나는 단계, 지성리듬은 부족한 지식과 지혜를 채우고자 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이를 현대인의 삶에 비추어 보면 30대 중반까지는 신체리듬에, 30대 후반부터 50대 중반까지는 감성리듬에, 50대 후반부터 70대 중반까지는 지성리듬에 각각 집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상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거개가 신체리듬에서 허우적대고 있거나 감성리듬과 신체리듬을 편의대로 취사선택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애도 애고, 어른도 애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각성-지혜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모두 마음자리가 텅텅 비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 별나면서도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작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마음의 풍요를 어떻게 채울까 하는 궁리는 뒷전입니다.
쓸데없고 과분한 욕망 채우기에만 열불을 올리고 있습니다. 타자를 속이는 걸 넘어 이제 자신까지 속이는 인간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가득 채운다고 행복해질 일도 아닌 것을, 행복의 묘법은 각자 마음자리에 있는 것을 잘 모릅니다.
유치(幼稚)한 단계에서 연명하면서 서로 잘났다고 아웅다웅하는 데만 급급하기 때문에 뭣이 중한지 보이지 않습니다.
불나방처럼 오늘도 주식 그래프에 꽂혀, 비트코인 망상에 사로잡혀, 아파트 분양당첨이 대단한 동아줄인 양 착각하며 옆도 뒤도, 제 부모도, 제 형제도, 제 이웃도 못 돌아보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도처에 넘쳐납니다.
내 마음자리는 어디쯤 있나 살펴보시고, 영 뚱딴지 같은 곳에 가 있거나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면 본래의 자리로 가져다 놓으시길 바랍니다.
불타(佛陀)는 “부처는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공히 평등하게 누구나의 마음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심보통 두 손 모음 2021.9.17짓고 2023.4.30 일부 수정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