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도시 사정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사는 대전은 3~4년 전만 해도 교통 흐름이 광역시치고 굉장히 좋았다. 차량 보유자가 늘면서 이제 대전 도심도 대구만큼이나 대낮 정체가 심해졌다.
최근 도로법 개정령이 시행되면서 선진 유럽국가처럼 우리 도심도 제한속도가 60km에서 50km로 강화됐고, 초등학교 스쿨존에는 어김없이 제한속도 30km 단속카메리가 설치됐다.
나는 이 현상, 이 변화를 우리 사회가 ‘그저 선진 사회로 가고 있다’는 방증으로만 보지 않는다. 코로나19 사태와 시점이 겹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멍난 나라 곳간을 채우려는 고육책이 이 같은 제한속도 강화에 담겨 있다고 본다. 아니, 그렇게 확신한다.
기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가 경제규모와 상대해 준법정신이 심각하게 결여돼 있다.
한국 경찰청 통계는 이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000년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은 1198명, 무고죄는 2956명, 사기죄는 5만386명이었는데 2013년에는 위증이 3420명, 무고가 6244명, 사기가 29만1128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일본의 66배에 이르는 것이며,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165배나 많은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한국의 사기 피해액이 43조원에 달하며, 이는 한국이 세계 제1의 사기 대국(大國)이자 부패 대국이란 걸 보여준다. 이 원인은 학력 위주 사회구조, 치열한 경쟁과 사생결단적 사고, 무슨 수로라도 주위를 밀어내고 올라서려는 욕구 등에 있다.
각설하고, 흔히들 세월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한다. 10대는 10km로, 20대는 20km로, 30대는 30km로… 50대는 50km로 체감하는 식이다.
제한속도가 강화된 도심에서 차를 몰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30km를 의식해 달릴 땐 그 속도가 그리 빠른지 느끼기 힘든 반면 50km를 의식해 달릴 땐 그 속도도 무지 빠르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어제 형님과 잠깐 통화하는데, 47세인 형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휴, 벌써 12월이네.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몰라.”
우리집엔 대한민국의 허리층인 40대가 셋이나 있다. 48세인 누님과 47세인 형님 그리고 43세인 나다.
시간의 속도를 가장 짙게 경험 중인 사람은 단연 누님일 것이다. 태어나는 순서는 있지만 가는 순서는 따로 없다고들 하지만, 세월의 속도 체감 순서는 태어나는 순서와 같은 게 우리네 인생이다.
나만하더라도 새벽 5시에도 일어나고 어떨 때는 새벽 3시에도 일어나 부산을 떨어보지만 예전 같지가 않다. 기억력도, 일의 속도도, 파릇파릇한 아이디어도 모두 예전만 못한 채 시간에 쫓겨, 시간에 밀려 어디론가 속절없이 휩쓸려가는 느낌을 곧잘 받는다.
‘나무박사’ 강판권 계명대 교수는 “인간(人間)은 공간(空間)에서 시간(時間)을 채우는 존재”라고 정의했는데, 적확하다.
75세인 내 어머니는 몇 해 전부터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내가 내 몸을 어떤 필요에 의해 새벽 일찍 일으키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어머니 패턴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어디 가실 일도 없는데 좀 더 주무시면 좋을 걸. 왜 저러실까.’
어머니 사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무지 바빠. 그렇게 일어나야 그나마 뭘 좀 할 수 있어. 그래도 해놓은 걸 보면 딱히 한 건 없어. 먹통이야. 머리도, 손도, 발도 내 마음 같지 않아.”
어머니가 찾은 묘책은 결국 신(神)이 인간에게 공히 부여한 24시간을 앞당겨, 절약해 쓰는 거였다.
마흔 셋인 나는 몇 달 전부터 그런 어머니 삶을 깊고 짙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맞아. 강판권 교수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인간은 공간 속에서 시간을 가꾸는 존재야. 그리고 그 시간은 나이와 비례해 쏜살같이 달려나가. 40대도 이런데 50km로 달리는 50대야 오죽하겠어. 나이 들면 잠이 없어진다는 말의 참뜻은 값진 인생을 꾸리겠다는 생의 의지고 반영인 거야.’
탁월한 인문학적 글쓰기로 팬덤을 형성한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초고도로 분화된 사회, 초스피드로 다변화하는 사회에서 전문가가 되는 길은 그 분야 책 5권을 독하게 파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인간은 40대가 되면, 그제야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철학의 길목에서 서성거리게 된다. 어렴풋이 세상 이치를 알아가면서부터, 생의 전선에서 쓴맛을 봐가면서 그렇게 ‘삶’을 궁고(窮考)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