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쉽게 안바뀐다. 내가 옳다는 신념 하나로 그것을 말했다고 해서 금방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다.
세상의 커다란 벽과 마주해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에 따라서 멘붕이 오기도 한다. 아무도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진실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한다. 그리고 그것에 이어지는 낙담과 이웃들의 냉소, 자조 등의 감정은 참 세상 살아가는 힘을 쭉쭉 뺀다. 거악은 당연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웃 간의 작은 갈등에 내 일상이 절반쯤 걸처만 있어도 우리는 살아갈 희망을 잃는다. 불의와 거짓은 정의와 진실을 억누르며 정신적 고통과 불안을 안겨준다.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쁜데 예상치 못하게 드리워진 검은 공포는 그나마 남아있던 빛마저 덮어 버린다. 지역 바깥을 보면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족들이 그러할테고, 일본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해양 방류 계획 철회를 촉구하며 단식 농성에 들어간 어민들의 고민도 남의 일이 아니다. 조용히 살기도 벅찬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반민주적 국가나 직장, 단체의 이런 결정이 먹고 살기에도 바쁜 사람들을 집회와 시위 현장으로 내몬다. 이런 뉴스를 도배하는 청천벽력같은 큰 소식이 나라뿐이던가.지역에서 무작정 비집고 들어오는 부조리와 부패의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민의 몫이다. 이슈의 크기와 무게는 다를지라도 다가오는 불안의 무게는 비슷하다. 비상식적이고 반민주적인 결정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도 쉬이 바뀌지 않는다.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된다 한들 순간적으로 ‘앗! 뜨거’ 할지 모르지만 금방 바뀌지는 않는다. 경천동지할 일이 닥쳐도 납작 엎드려 있으면 지나갈 소나기요, 잠시 흔들리다 마는 풀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럴때 지친다. 다 접고 세상과 인연 끊으려 마음 먹을 수 있다. 울화통이 터져 홧병에 걸리고, ‘더러운 지역 떠나고 말지’ 할 수도 있다. 혐오와 분노의 감정에 없던 우울증이 생긴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더할 나위없는 끈질김이다. 옳다는 확신이 들면, 이게 정의다 싶으면 그것만 붙들고 선량한 내 이웃을 믿고 가는 것이다.
때론 기자도 지친다. 계속되는 이슈, 해결되지 않고 반복되는 사건들은 독자들도 질리게 하고 쓰는 기자도 힘든다. 하지만 역시 일깨워 주는 것은 일단의 정의로운 주민들이다. 끊임없이 잘못됐다 일깨워주고 알려야지라고 말해주는 주민, 그리고 말 없어도 침묵으로 지원해 주는 이웃들이다.
영천향교의 장의 임기를 두고 시끄러운 사정이 제보됐을 때 맨 처음에는 자정작용에 의한 내부 정리를 원했다. 그렇게 조용해지나 싶을 즈음 몇 주가 지났는데 잡음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양반을 자처하는 유림의 이야기라 조심스럽기도 했다. 누가 지역 주간신문에 신경이나 쓰겠느냐마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 관심을 기울였다. 기사가 나간지 4주가 지났다. 그러나 뭔가 변화가 있을거라던 기대는 가차 없이 꺾어버렸다.
갑질논란도 끝이 없다. 인정을 하거나 아니면 시시비비를 가리면 될 일을 길게 끌며 여러 사람 지치게 한다. 세상의 작은 일 하나 바꾸는게 이렇게 어려우니 ‘계란으로 바위치기’ 이야기는 그 먼 옛날부터 이날까지 이어져 오는 모양이다.
이런 일들로 인한 피해는 거의가 약자 몫이다. 그 약자의 희생과 가진자들의 카르텔로 호의호식하는 사회를 정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돈도 빽도 힘도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게 맞다’는 믿음 하나를 끝없이 알리고 버텨내는 일 뿐이다. 이 지역에도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뤄지고, 그것이 넓고 깊게 뿌리 내려 정의로운 사회가 돼야 한다.정의가 없는데 무슨 탑을 쌓을 수 있으랴. 다시 한번 영천사회에 정의가 강물같이 흘러 착한 사람들이 발딛고 살 수 있는 토양을 우리 스스로 잘 만드는지 반성하고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