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많은 시민들이 풍수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2016년 1월부터 2020년 말까지 약 5년간에 걸쳐 “재미있는 풍수이야기”를 연재 하였는바 독자들의 재요청에 의하여 또다시 풍수지리 전문가 양삼열(楊三烈)교수의 글을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올바로 정립된 풍수학문의 전달과 풍수인식에 대한 잘못된 사고 등 풍수전반에 관한 유익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함으로서 애독자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에 가면 조선 중기의 대학자 우암 송시열의 묘소가 있다. 원래 송시열의 묘소는 경기도 수원의 무봉산에 있었으나 숙종 23년(1697)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이곳은 노론사림(老論士林)의 중심인 화양서원이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 학자들의 집결장소였으며 송시열이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의 생애는 인조 11년(1633) 27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2년 뒤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었다. 병자호란 후 낙향하였으나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어 반청(反淸)을 기치로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며 현종 때는 좌의정까지 올랐다. 1689년(숙종15년)에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며 국문을 받기위해 상경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전북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직이 회복되었다. 사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하며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와 효종묘(孝宗廟)에 배향되었으며 전국 23개의 서원에서 제향 되었다. 그는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고 우리나라 학자 중 공자, 맹자와 같이 ‘자(子)’字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충북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문동리 산 114-2 번지에는 그의 증조부모의 묘가 辛坐乙向(東向)으로 모셔져 있고 조부의 묘도 바로 밑에 있다. 이 묘소의 풍수입지는 옥녀가 베를 짜는 형국인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이라 불리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가에선 이 조상들의 음덕으로 송시열이란 큰 인물이 배출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묘소는 안산이 수체(水體)로 깃발처럼 보이고 묘소 아래에 군졸을 의미하는 청천시장이 있어 풍수가에선 이곳을 장군대좌형의 명당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형국이 아무리 좋아도 점혈이 잘못되면 무용지물이다. 필자의 식견으로는 묘소가 위치해 있는 곳이 혈처가 아닌 내룡이 우측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요도지각의 윗부분이고 묘소아래쪽은 계곡으로 계곡 풍을 맞는 호구 처로 보였다. 묘소의 좌향은 자좌오향의 정남향이고 물은 우선수로 향을 지나 손사(巽)방위로 빠져나간다. 이는 팔십팔향법으로 볼 때도 제일 흉하다는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을 범하였다. 자좌오향은 변국을 하면 화국(火局)이 되고 손사(巽巳)방위는 십이포태법으로 임관궁(臨官宮)에 해당되니 『地理五訣』에서는 이러한 향에 대해 다 큰 자식이 죽고 본국의 재록을 담당하는 복(福)궁까지 치고나가니 명예와 재물 모두를 잃는다는 아주 흉한 향이다. 이럴 경우 향을 우측으로 조금(7.5도) 돌려 계좌정향을 놓았더라면 88향법에서 제일 좋다는 정양향이 된다. 아무리 좋은 형국이라도 정확한 지점에 정혈이 되어야 하고 국세(水勢)를 보아 지형에 맞는 좌향을 놓아야 발복을 기대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