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이 부부관계가 나빠 고민하던 수제자 이함형(전라도 순천 사람)에게 써준 편지가 전한다.  퇴계는 단양 기생 두향과 세기의 로맨스를 남기기도 했지만, 첫 번째 부인과는 일찍 사별하고, 3년 뒤 맞은 두 번째 부인과는 16년을 살았는데 참 불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퇴계가 멀리 순천에서 안동까지 성리학을 배우러 온 이함형의 개인사를 전해 듣고 그의 귀향길에 손수 편지를 한 통 써주었다.  함형은 이를 황공하게 여겼다. 퇴계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집에 가는 도중에는 이 편지를 읽지 말게. 도착한 후에 집에서도 읽지 말게.” 함형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반드시 집에 도착하여 집 사립문 앞에서 읽어보시게.”  이 편지는 고문임에도 제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스승의 마음과 그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기 위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방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되레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주는 듯하다.   [글밥] 독자들께 일독을 권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예의가 있다” 하였으며, 자사는 말하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나 그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천지의 모든 원리와 직결된다”고 하였다. 또 시(詩)에서 말하기를 “처자와 잘 화합하되 마치 거문고와 비파가 조화되듯 하라” 하였으며, 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부모란 자식이 화합하면 그저 따를 뿐이로다”고 하셨으니, 부부의 윤리란 이처럼 중대한 것이니 어찌 마음이 서로 맞지 아니한다고 소박할 수 있겠는가.  <대학>에 말하기를 “그 근본이 어지러운 자로서 끝을 다스린 자가 없으며, 후하게 대접하여야 할 자리를 박하게 대하면서 박하게 대해도 좋은 곳에 후하게 대하는 법은 없느니라.” 이에 맹자께서 거듭하여 또 말하기를 “후하게 대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을 박하게 하는 사람은 어떠한 일에서나 박하게 대한다”고 하였다. 슬프도다. 사람됨이 이리 각박하다면 어찌 부모를 섬길 것이며, 어찌 형제와 일가친척과 고을 사람과 잘 지낼 것이며, 어찌 임금을 섬기고 남들을 부리는 근본적인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들으니 그대가 부부간에 화합하지 못한다는데, 무슨 이유로 그러한 불행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네. 살펴보건대 세상에는 이러한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그 가운데에는 부인의 성품이 악덕해서 고치기 어려운 경우와 모양이 못나거나 지혜롭지 못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 남편이 방탕하고 취미가 별달라서 그렇게 되는 등 여러 경우가 있는 것이나 그러나 대체로 성품이 악덕해서 고치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남편이 항상 반성하여 잘 대해줌으로써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아니 하면 가정이 파괴되고 자신이 더 말할 수 없는 각박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 법일세. 아내의 성품이 악덕하여 고치기 어렵다는 사람도 그 정도가 아주 심하지 아니하면 또한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하여 마침내 서로 헤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옛날에는 아내를 내쫓으면 다른 사람에 시집을 갈 수 있었으므로 칠거지악을 이유로 아내를 내쫓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여자는 한 번 시집가면 평생 한 남자를 따라야 하는데, 어찌 마음이 맞지 아니한다고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처럼 또는 원수 보듯 하여 자기 아내를 허무하게 천리 밖으로 내쳐서 가정을 다스리는 도리를 망가뜨리고 자손을 끊기게 하는 불행을 저지를 수가 있겠는가. <대학>에서 말하기를 “자기에게 잘못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고 하였는데, 이 점에 있어서 내 경우를 들어 말하겠네. 나는 일찍이 재혼하였으나 한결같이 불행이 심하였네. 그러나 나는 스스로 각박하게 대하지 아니하고 애써 잘 대하기를 수십년이나 했다네. 그간에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어찌 생각대로 인간의 근본도리를 소홀히 하여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근심을 사게 하겠는가. 옛날 후한 때의 사람 질운이 ‘아내와 부부의 도리를 어기어 자식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는 실로 진리를 어지럽히는 사특한 자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내가 이 말을 빌려 자네에게 충고하노니, 자네는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하여 고치도록 힘쓰도록 하게. 이 점에 있어서 끝내 고치는 바가 없으면 굳이 학문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실천한단 말인가. <유림3> pp165~169 /심보통 202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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