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창 정제(鄭梯)의 백학서원 풍영루 중수 기문(1761년 소작)  만력 40년(1612. 광해4) 임자년에 고을의 유지인 김득우 공이 맨 먼저 의논을 내어 (서당을 중수 할)재목을 모으고 기술자들을 모집하여 옛 집을 갱신하니 포사(관리사)와 묘우가 환하게 일신되었기에 드디어 두 분 선생의 제사 드림이 논의 되었지만, 그러나 다만 땅이 한 곳에 치우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 (사당)지음이 어려웠다. 효종조 무술년(1658)에 이양욱씨가 사림들과 의논하여 옮길 곳을 정하되 옛(사당)터의 북쪽 5리쯤 되는 오도리로 하였는데, 그 땅의 맑고 빼어남이 백학산보다 못하지 않았다. 인하여 백학산의 옛 이름(백학서당)으로 서원을 건립하여 관리사와 창고 그리고 포사를 먼저 이루었다. 기유년(1669)에 이성춘이 강당을 만들고 정사년(1677)에 이동석이 사당(묘우)을 만들었으며 이듬해 무오년(1678)에 조영하씨가 널리 도내 유림(선비)들을 맞이하여 3월의 두번째 정일(丁日)에 드디어 이선생(퇴계)을 봉안하고 이로써 금계 황준량 공을 종향(從享)하였다. 서당(백학서당)으로부터 나아가 서원이 되고, 문하의 제자로 인하여(즉 황준량) 선사(퇴계)를 좆아 제사 드리니 소요하시던 향기 남긴 땅이 끝내 제사 드리는 곳이 되어, 많은 선비들의 크게 사모하는 정성으로 드디어 드높이 받드는 예를 이루었다. 봄가을 제사 드림에 번다한 의식이 깨끗하며 선비와 벼슬아치들 떼 지어 살면서 주선할 곳이 있으니, 즉 그 우러러 사모하는 도리가 거의 유감이 없구나. 그러나 만일 답답한 가슴을 풀고 정신과 기운을 펼치려면 반드시 높은 다락의 위태로운 난간과 바람 부는 기둥과 서늘한 집이 있어야 옮겨 기대며 멀리 바라 볼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다락 없음을 한할 것이다. 신사년(1701)에 한 고을이 모두 도모하여 많은 선비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에 강당의 남쪽에 다락을 만들되 기둥 넷을 하고서 편액하기를 ‘풍영루’라 하였으니, 이로부터 모든 선비들이 이 다락에 오를 때 그 상쾌하고 즐거움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고 해가 쌓여 바람에 쓸리고 비에 떨어져 장차 무너지는 걱정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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