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귀애 조극승(曺克承) 龜厓 曺克承1803(순조3)~1877(고종14)임진왜란에 불에 타고 만력 년간에 한 고을의 선비들이 개탄하여 두 분 선생의 향사 드리는 논의가 있었지만, 옛터는 곧 산은 높고 길은 험하여 가히 영원한 계책이 되지 못하여 지금의 장소로 터를 잡아 옮겼지만, 지금에 이르러 유적은 영원히 땅에 묻혀지고 선비들은 돌아가 의지 할 곳이 없었으니, 주위 한 경내의 유식한 선비들이 더욱 (선현들을)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생각을 금치 못하여 늦은 봄날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이 약속하여 양강에서 목욕하고 백학산에 올라서 종일 시를 읊고 노래함이 약간의 글이 됨은 모두 옛사람의 뜻을 잊지 못함이었다. 그리하여 현명한 고을 수령의 도움을 입어 서문을 붙이고 아울러 칠언율시를 주었으니, 어찌 바로 당일 논 선비들의 흥이 옛사람보다 더욱 빛남이 아니겠는가? 이에 졸고를 드려 감히 밝은 가르침을 바라노라.산은 절로 아득하고 물은 절로 밝으니백년의 옛 자취는 사라져 소리가 없어라풍광은 당시의 정취를 덜어내지 못하고사모하는 마음은 두루 오늘 술잔에 넘쳐난다사라지고 자라나는 금단에도 계수나무는 늙어가고많고 성한 옥패엔 고운향기 맑구나오늘의 놂 어찌 한가함을 훔쳤으리고개 들었다 숙이는 사이에도 정감이기지 못하네(계속)​ 5. 희암고(希巖稿) 김재석 소작(1857~1925) 본관 영양. 1900년 지음 신녕의 백학서당은 가정 년간 금계 황공께서 이 고을에 부임하시어 사림(士林)을 위해 양강(羊江)의 위 백학산의 아래에 한 채의 집을 지어 퇴계 이황선생에게 품부(稟賦)하여 절목(節目)을 정함으로써 한 고을의 많은 선비들의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숙종조 무오년(서기1678)에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능산(陵山)아래에다 이축(移築)하여 “백학서원“이라 편액하여 퇴계선생을 주향(主享)으로 금계 황준량을 배향(配享)으로 하여 이로써 갱장(羹牆)의 사모함을 부친 것이 100여년에, 고종조 무진년(서기1868) 서원 철폐령으로 이 서원을 철거하여 위토(半畝)와 묘우(明宮)는 잡초가 우거지고 주춧돌은 평평해졌으며, 높은 담장은 언덕의 빈터에 몰입(沒入)되었으니, 이 서원을 다시 세우자는 무리들(縫掖之倫)이 어찌 고금(古今)의 느낌이 없겠는가? 정이천(程頤)이 말하기를 ‘우물은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은 차마 버릴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그윽이 예전의 서원을 생각해보면 본래 선비들의 학문하는 장소인지라 비단 (성현을)제사하는 곳일 뿐만이 아닌즉, 강당을 세워 학문을 강론함이 무엇에 구애된단 말인가? 이에 고을의 선비 모모씨 등이 서원을 새로 짓는 일을 주간하여 옛 법도로 나아가 새롭게 하고 서원으로 인하여 강당으로 하니, 무릇 10칸 가운데 3칸을 강당으로 하고 서쪽의 위는 방으로 남쪽의 날개는 다락으로 동쪽의 위는 실(室)로 남쪽의 날개를 퇴실(退室)로 하니, 으리으리하게 큰 집이라. 다만 보이느니 운물(雲物)은 경관을 바꾸고 초목(草木)은 그 색깔을 더한다. 우리 고을의 군자들이 옷자락을 걷고 올라 선정(先正:先哲)의 글을 읽고 선정(先正)의 도(道)를 강론(講論)하여 선정(先正)의 가르침으로 하여금 환하니 다시금 세상을 비추게 한다면, 즉 저 세상 밖(世外)의 사악한 말(邪說)과 잘못 된 학문(曲學)은 저절로 햇빛아래 눈처럼 녹을 것이며, 이 강당은 장차 양강과 학산과 더불어 무궁한 훗날에 까지 흐르게 되리라. 강당이 이미 준공(낙성)되어 여러분들이 말씀하기를 “기문을 써 주게”라 하기에, 자신을 돌아보면 또한 퇴계 선생의 남긴 무리(遺徒)이며, 하물며 욕되게도 강당의 임원임에랴? 의리상 감히 글재주 없음으로써 사양치 못하고서 드디어 이로 기문을 쓰노니 여러 군자들은 외울 지어다.​□ 문헌으로 본 백학서원의 연혁 1. 백학서당의 설치 서당은 금계 황준량이 신녕현감 재임 기간 중 설치되었으니 서기 1552년이다. 2. 설치 장소 신녕현 대량면 추곡의 백학산으로 지금의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백학산이 양강(고현천)과 만나는 절벽 위 3. 규모 : 강당 고직사 우물(묘우는 없음) 4. 설치 목적 당시 신녕현 관내에는 관학인 신녕향교를 제외하고 별다른 교육기관이 부재하여, 성현의 가르침으로 풍속을 변화하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강학의 장소로 활용. 5. 개요 금계 황준량은 백학서당을 만들기 전에 도산으로 가서 스승인 퇴계선생을 뵙고 절목(節目)과 현판과 주련(존심주경(存心主敬) 옥간풍대(玉澗風臺))을 받아 옴. 금계 황준량은 스스로 서문을 지어 사실을 기록하고 시(詩)3편과 도산서원의 학규(學規)로 학문을 권장하고 권면하는 본보기로 삼음. 6. 변천 ○정사(精舍)-백학서당(白鶴書堂) 1552년 ○중수 – 포사와 묘우 중수. 1612년 ○이건-화남면 능계(오도리)로 이건하고 백학서원으로 이름을 바꿈. 1658년 ○증축 – 관리사 창고 포사를 지음. 1669년 ○증축 – 묘우 건립. 1677년 ○위패봉안 및 향사 - 퇴계 이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금계 황준량 종향(從享)으로 춘추 두 차례 향사. 1678년 ○풍영루 건립 – 서원의 외삼문. 1701년 ○훼철(毁撤) -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1868년 ○강당 재축(再築) - 백학서당 강당을 다시 지음. 1900년 ○백학학원으로 개명하고 신교육 실시 – 1920년​□현황 백학서원의 옛 터에 남아 있던 백학서당의 강당은 100여년 사이에 허물어져 폐허로 남았더니 2016년 호국보훈시설로 지정되어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강당건물이 새롭게 지어지고 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당초 금계선생께서 처음 서당을 지으신 백학산의 고지(故址)에 백학서당을 처음 규모로 서당을 중건하여 선생의 유지도 받들고 나아가 세교(世敎)에 활용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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