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희암고(希巖稿) 김재석 소작(1857~1925) 본관 영양. 1900년 지음
신녕의 백학서당은 가정 년간 금계 황공께서 이 고을에 부임하시어 사림(士林)을 위해 양강(羊江)의 위 백학산의 아래에 한 채의 집을 지어 퇴계 이황선생에게 품부(稟賦)하여 절목(節目)을 정함으로써 한 고을의 많은 선비들의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숙종조 무오년(서기1678)에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능산(陵山)아래에다 이축(移築)하여 “백학서원“이라 편액하여 퇴계선생을 주향(主享)으로 금계 황준량을 배향(配享)으로 하여 이로써 갱장(羹牆)의 사모함을 부친 것이 100여년에, 고종조 무진년(서기1868) 서원 철폐령으로 이 서원을 철거하여 위토(半畝)와 묘우(明宮)는 잡초가 우거지고 주춧돌은 평평해졌으며, 높은 담장은 언덕의 빈터에 몰입(沒入)되었으니, 이 서원을 다시 세우자는 무리들(縫掖之倫)이 어찌 고금(古今)의 느낌이 없겠는가?
정이천(程)이 말하기를 ‘우물은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은 차마 버릴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그윽이 예전의 서원을 생각해보면 본래 선비들의 학문하는 장소인지라 비단 (성현을)제사하는 곳일 뿐만이 아닌즉, 강당을 세워 학문을 강론함이 무엇에 구애된단 말인가?
이에 고을의 선비 모모씨 등이 서원을 새로 짓는 일을 주간하여 옛 법도로 나아가 새롭게 하고 서원으로 인하여 강당으로 하니, 무릇 10칸 가운데 3칸을 강당으로 하고 서쪽의 위는 방으로 남쪽의 날개는 다락으로 동쪽의 위는 실(室)로 남쪽의 날개를 퇴실(退室)로 하니, 으리으리하게 큰 집이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