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전례 없이 긴 장마 끝에 소나기도 없는 불볕더위가 계속되어 입추(立秋)인 오늘에도 폭염이 이어지고 있는데, 급기야 모레 말복(末伏) 날에는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관통한다고 온 소식통이 떠들썩하다. 코로나19가 숙진 탓에 무척이나 바쁜 여름이라, 나날이 콩죽 같은 땀방울로 목욕하다시피 보내고 있으니 연신 울려대는 휴대폰의 온도가 38도라느니, 폭염주의 안전문자에도 별 감흥이 없다. 그저 깊은 밤에 저 산으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내려오면 고마울 따름이다. 도시의 둥지들은 매일 밤 열대야에 시달리고 있다 하니 이보다 고마운 일이 더 어디 있으랴 한다. 어떤 것도 항상(恒常)하지 않나니, 이제 며칠 뒤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선선한 바람 부는 가을이 올 터이다. 지금도 해질 녘이면 고추잠자리가 마당에 떼를 지어 날아다니고 하늘이 높고 푸른 것이 가을 하늘을 연상케 한다. 자연은 이렇게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묵묵히 설하고 있나니 …….
93. 敬次叔主1)除夕2)韻(경차숙주제석운)
삼가 숙주의 제석 시 운자를 빌려 짓다
年來年去若流雲(연래연거약류운)
勝算無如讀古文(승산무여독고문)
誰識燕鴻3)皆異志(수식연홍개이지)
人言鳥獸不同群4)(인언조수부동군)
元朝賀語循良俗(원조하어순량속)
古疊愁容起鬱(고첩수용기울분)
發快輪燈5)因獨坐(발쾌윤등인독좌)
城頭曉鐘數聲聞(성두효종수성문)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것이 흘러가는 구름 같으니
이길 셈은 옛글을 읽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네.
제비와 큰기러기 모두가 다른 뜻을 품은 걸 누가 알겠는가?
사람들은 날짐승 길짐승은 함께 살지 않는다고 말하지.
새해 아침 인사말은 좋은 풍속을 따르고
오래도록 쌓였던 근심스런 얼굴, 우울한 기분 떨쳐내네.
곧바로 윤등(輪燈) 켜서 밝히고 홀로 앉았으니
성 마루 종각에서 새벽 종소리 간간이 들리누나.
94. 除夜(제야) 한 해를 보내며
偶然再到金魚6)前(우연재도금어전)
準備迎春種福田7)(준비영춘종복전)
樓閣寂寥空日色(누각적요공일색)
山門蕭瑟滿香烟(산문소슬만향연)
看雲步月依宵立(간운보월의소립)
携酒論詩復午眼(휴주논시부오안)
擊鐸一聲催曉漏8)(격탁일성최효루)
明朝消息又一年(명조소식우일년)
우연히 다시 금어 앞에 이르러니
봄 맞을 준비를 하며 복전을 베풀고 있네.
누각은 고요하고 햇살도 한가한데
산문에는 소슬하니 향연기가 가득하구나.
구름 보며 달을 따라 걸으면서 밤을 지새우고
술잔을 들고 시를 논하니 다시 낮잠을 자네.
목탁 치는 소리 한 번에 새벽을 재촉하니
내일 아침 또 한 해가 밝았다는 소식이리라.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史)33p > 동엄 정환직 선생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