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희암고(希巖稿) 김재석 소작(1857~1925) 본관 영양. 1900년 지음
다만 보이느니 운물(雲物)은 경관을 바꾸고 초목(草木)은 그 색깔을 더한다. 우리 고을의 군자들이 옷자락을 걷고 올라 선정(先正:先哲)의 글을 읽고 선정(先正)의 도(道)를 강론(講論)하여 선정(先正)의 가르침으로 하여금 환하니 다시금 세상을 비추게 한다면, 즉 저 세상 밖(世外)의 사악한 말(邪說)과 잘못 된 학문(曲學)은 저절로 햇빛아래 눈처럼 녹을 것이며, 이 강당은 장차 양강과 학산과 더불어 무궁한 훗날에 까지 흐르게 되리라.
강당이 이미 준공(낙성)되어 여러분들이 말씀하기를 “기문을 써 주게”라 하기에, 자신을 돌아보면 또한 퇴계 선생의 남긴 무리(遺徒)이며, 하물며 욕되게도 강당의 임원임에랴? 의리상 감히 글재주 없음으로써 사양치 못하고서 드디어 이로 기문을 쓰노니 여러 군자들은 외울 지어다.
문헌으로 본 백학서원의 연혁
1. 백학서당의 설치
서당은 금계 황준량이 신녕현감 재임 기간 중 설치되었으니 서기 1552년이다.
2. 설치 장소
신녕현 대량면 추곡의 백학산으로 지금의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백학산이 양강(고현천)과 만나는 절벽 위
3. 규모 : 강당 고직사 우물(묘우는 없음)
4. 설치 목적
당시 신녕현 관내에는 관학인 신녕향교를 제외하고 별다른 교육기관이 부재하여, 성현의 가르침으로 풍속을 변화하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강학의 장소로 활용.
5. 개요
금계 황준량은 백학서당을 만들기 전에 도산으로 가서 스승인 퇴계선생을 뵙고 절목(節目)과 현판과 주련(존심주경(存心主敬) 옥간풍대(玉澗風臺))을 받아 옴. 금계 황준량은 스스로 서문을 지어 사실을 기록하고 시(詩)3편과 도산서원의 학규(學規)로 학문을 권장하고 권면하는 본보기로 삼음.
6. 변천
○ 정사(精舍)-백학서당(白鶴書堂) 1552년
○ 중수 – 포사와 묘우 중수. 1612년
○ 이건 - 화남면 능계(오도리)로 이건하고 백학서원으로 이름을 바꿈. 1658년
○ 증축 – 관리사 창고 포사를 지음. 1669년
○ 증축 – 묘우 건립. 1677년
○ 위패봉안 및 향사 - 퇴계 이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금계 황준량 종향(從享)으로 춘추 두 차례 향사. 1678년
○ 풍영루 건립 – 서원의 외삼문. 1701년
○ 훼철(毁撤) -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1868년
○ 강당 재축(再築) - 백학서당 강당을 다시 지음. 1900년
○ 백학학원으로 개명하고 신교육 실시 – 1920년
현황
백학서원의 옛 터에 남아 있던 백학서당의 강당은 100여년 사이에 허물어져 폐허로 남았더니 2016년 호국보훈시설로 지정되어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강당건물이 새롭게 지어지고 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당초 금계선생께서 처음 서당을 지으신 백학산의 고지(故址)에 백학서당을 처음 규모로 서당을 중건하여 선생의 유지도 받들고 나아가 세교(世敎)에 활용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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