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산남의진이라는 네 글자를 알게 된 후로 산남의진기념사업회를 재발족하고 부회장직을 맡아 산남의진 선양작업을 다각도로 벌이면서, 2018년 11월부터 지금까지 경북동부신문의 지면을 빌어 산남의진 열전과 산남의진역사를 소개해 왔다. 물론 산남창의지와 산남의진유사에 기록된 것들이다.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이제 기념사업회의 업무를 내려놓게 되었다.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나 무상(無常)의 이치를 아는 까닭에 흔쾌히 내려놓는 공부를 한다.
돌아보니, 처음 열전을 소개하면서 급한 마음에 기록의 내용을 너무 축약해서 소개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래서 다시 출발선에서 산남창의지(山南倡義誌)와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史)에 기록된 의사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제는 그저 산남의진기념사업회의 임원이 아니라 산남의진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평범한 이 땅의 후손으로서 하는 일임을 밝혀둔다.
정순기(鄭純基)
자는 사홍이요 호는 검와이며 동엄 정공의 재종질이다. 평소 성품이 비분강개하고 과감함이 있어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을 굳게 지키려 함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나이 스물이 채 되기도 전에 서울지방을 유람하면서 꽃과 새들의 유혹에 대하여 유감이 있어 억지로라도 추구하고자 하였지만1)1) 정순기는 평소 벼슬을 통하여 공명의 길을 가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영달을 추구하기 보다는 천하를 위한 대의의 뜻으로 단오공이 자신을 일깨워주자 즉시 공명으로의 길을 접었다 한다.
재종형인 단오공의 가르침과 깨우침을 받고 감명을 받아 자신이 추구하던 꿈을 접었다. 재종형인 단오공이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 남쪽 영남지방으로 내려와 의거(義擧)하자 순기도 솔선하여 각 지역으로 나가서 주요한 인물들과 통모(通謀)를 맺고 급기야 의진을 만들어 소모(召募)의 임무를 맡아 많은 도움과 성과를 올렸다. 단오공이 혼자서 경주로 갈 때는 사이 길을 따라 정공을 수행하다가 몰래 관청 주변 사람들과 연통하여 훗날 어려움이 없도록 조처하고 의병진으로 돌아와서는 이한구와 함께 각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싸우다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알고 잠시 의병활동을 중지하였다. 또 정미(丁未 1907)년의 의거에는 사방으로 달려가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였으며 특히 친구가 된 신태호의 영해진과 산남의진 간의 교의(交誼)를 혼자 맡아서 서로 소통하였다. 입암전투가 있을 때는 마침 소모(召募)의 일로 밖으로 나간 터라 여러 공들과 더불어 같이 죽지 못한 것이 깊은 한으로 남아 있었다. 호소(縞素)의 예로 단오공을 장례하고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하여 동엄공을 보좌하여 죽음과 어려움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영덕에 이르러 탄환이 떨어진 때문에 전쟁을 계속하지 못하여 동엄공을 모시고 한 곳에서 요양을 하다가 여러 의병들과 함께 각 지역으로 흩어져 탄환을 구한 다음 다시 관동에서 만나기로 기약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동엄공이 상옥의 고천에서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으니 그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결심하였다. 좌우의 가까운 사람들이 말리면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남은 의병들을 다시 편성하여 복수를 도모함이 의리상 마땅하거늘 어찌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고집을 이처럼 부린단 말이오?”라 하자 순기는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고 최세한을 장령(將領)으로 추대하고 이세기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의병과 군기 등을 모집하고 한편으로는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이 끝내 불리하여 최세한이 또 적에게 사로잡혀 감옥에 갇혀 돌아오지 못하자 구한서와 함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후일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자신들이 숨어 있는 사실이 적에게 누설되어 사로잡히고 말았다. 옥중에서도 터럭만큼이라도 적에게 꺾이지 아니한 순기에게 감옥을 맡은 관리가 장차 협력하라고 회유하는 말을 해오자 순기는 얼굴색을 바로 하면서 “나라의 종묘사직이 이미 엎어지고 친척들과 동지들이 모두들 나라 위해 죽었는데 나 혼자서 삶에 연연하겠소? 한번 죽는 것이 나의 계책이다.”라고 하자 적들 또한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감히 순기를 해치지 않았다. 옥에 갇힌 지 몇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청나라 사람 왕선달과 더불어 같이 나라 잃은 회포를 서술하다가 왕씨 또한 작별하였다. 그 후 산남의진 활동 중에 순절한 여러 분들의 사실과 발자취를 드러내고자 널리 이 사업에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구했지만 못된 인간의 해침을 당하여 그 일은 끝내 완수하지 못하였고 관동지방으로 피신하여 자연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마저 편안히 늙지를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