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純基 義士 略歷(정순기 의사 약력)
정순기는 자(字)는 사홍(士弘)이요 이요 호(號)는 검와(檢窩)이며 동엄선생의 종질(從姪)이라. 성품이 관후(寬厚)하고 또 과감(果敢)하였다. 평생에 생산작업에 뜻을 두지 아니하였다. 약관(弱冠) 때에 서울에 놀면서 벼슬을 구하려고 하다가 재종형 용기의 훈계를 받고 그만두었다. 본래 흥해(興海)에 거주하다가 시국이 점점 혼란하게 되는 것을 보고 시대를 광구(匡救)1)할 생각을 품고 영천(永川) 검단(檢丹)에 이주하여 재종(再從)형 용기, 이한구와 더불어 뒷날을 기다렸다. 광무(光武)2) 9년 을사(乙巳:1905)에 우리나라가 왜적들에게 소위 5조약(條約)이라는 모욕(侮辱)을 당하고 전국인심이 분격되어 모두 복수책을 강구하더니 이때에 단오공(丹吾公) 정용기(鄭鏞基) 그의 부공(父公)을 대행하여 임금의 밀조(密詔)를 받들고 영남에 내려와서 의병(義兵)을 모집하는지라 공(公)은 그 일에 전심전력으로 협조하여 인원모집과 물자수집에 큰 공을 세웠다.
병오(丙午:1906)년에 부서를 조직할 때에 소모장(召募將)이란 임명을 받고 진두(陣頭)에서 활약하다가 대장 용기 경주병정진(慶州兵丁鎭)에 속아서 대구로 압송(押送)될 때 공은 간도(間道)로 뒤를 따라서 관변(官邊)에 교섭을 취하여 옥중(獄中)에 연락하고 또 옥중 영향(影向)을 진중(陣中)에 통기하여 진중 동정(動靜)을 조종하였다.
정미(丁未 1907)년에 의병을 다시 모집할 때에 또 전년과 같이 노력하여 동지를 소환하고 물자를 증집하였다. 행진하는 날에 있어 또 소모장이란 임명을 받고 진두에 활약하여 위험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또 영해(寧海) 의병장 신태호와 교의(交誼)가 좋아 양 진영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정미 8월 하순에 자양(紫陽)에 침입한 침입한 왜적을 격파시키고 대진(大陣)이 서울로 총진군하기로 기한을 정할 때에 공은 각지 유격대들의 운동할 것을 주지(周知)시키고 군수물품을 수집하자면 시간의 여유가 있어야 될 것이라고 제의하여 각 부대를 각 지방으로 출장시키기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하여 각 부대를 갓 지방으로 파견시키고 공은 연해(沿海) 등지로 출동하였더니 그 사이에 입암패전(立巖敗戰)이 있어 본부장단(本部將壇)이 무너졌다. 공은 입암 소문을 듣고 본부에 돌아와서 대장장례를 호소례(縞素禮)로 거행하고 종숙(從叔) 동엄선생(東广先生)을 받들어서 진사총통(陣事總統)으로 뫼시고 부서를 다시 조직할 때 공은 소모장으로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