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많은 시민들이 풍수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2016년 1월부터 2020년 말까지 약 5년간에 걸쳐 “재미있는 풍수이야기”를 연재 하였는바 독자들의 재요청에 의하여 또다시 풍수지리 전문가 양삼열(楊三烈)교수의 글을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올바로 정립된 풍수학문의 전달과 풍수인식에 대한 잘못된 사고 등 풍수전반에 관한 유익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함으로서 애독자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번(1479~1544)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연산군 2년(1498)에 20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8년(1513) 35세에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대간으로 부터 요승(妖僧) 학조(學祖)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워 화를 면했고 관직은 통훈대부, 평양부서윤 겸 춘추관 편수관에 이르렀으며 사후에는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그리고 세자좌빈객에 증직추서 되었다. 김번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번지 석실마을에 있는데 이곳에 자리 잡게 된 연유가 있다. 김번의 큰아버지인 학조대사는 풍수에 식견이 있는 스님이었고 세조때 국사(國師)로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고승이었다. 그가 양주 화엄사에 있을 때 어느 날 김번의 처가 곳을 지나다가 처갓집에서 방앗간을 하고 있는 자리가 예사로운 자리가 아니었음을 간파하고 나중에 남편이 죽으면 이곳 방앗간 자리에 묻으라고 권고했다 한다. 이곳은 옥관자(玉貫子) 금관자(金貫子) 세말씩 나온다는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의 명당으로 우리나라 풍수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다녀온 조선의 8대 명당 중 한곳이다.
김번의 부인은 남양홍씨로 훗날 남편이 죽어 그곳에 묘를 쓰려고 하니 친정에서도 이곳이 천하명당임을 알아차리고 광중에 물을 붓는 등 묘를 쓰지 못하도록 회유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부인은 학조대사가 일러준 말을 상기하며 이를 눈치 채고 “상관없으니 그냥 쓰겠다”고 하여 남편을 그곳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또한 광중을 파던 중 황금색과 흰색 돌이 많이 나와 인부들이 이를 모두 걷어 냈는데 이를 본 학조대사가 노란 돌은 금괴이고 하얀 돌은 은괴라고 하며 자갈 하나가 벼슬 한 자리이니 욕심내지 말고 적당히 넣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 집어넣은 금괴가 모두 21개였는데 그의 후손 중에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정승이 15명 대재학이 6명을 합쳐 21명이 이 묘소의 음덕으로 나왔다는 전설도 있다. 하였튼 김번의 묘를 이곳에다 쓴 후 안동김씨 문중에서는 정승 15명, 왕비 3명, 대제학 6명, 판서 35명, 청백리 3명, 문과급제자가 무려 120명이나 배출되었다고 한다. 이 묘소는 조선왕조 말에 있었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관련이 있으며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된 김조순이 김번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정조의 죽음으로 순조가 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당시 왕을 보좌하던 김조순이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으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60여 년간이나 이어졌다.
이 묘소는 옥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은 형국과 같다하여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의 명당으로 유명하다. 혈장 좌우측 용호는 관쇄를 해주지 못하고 벌어진 상태지만 자기 안산으로 그 공간을 막아주니 혈전의 장풍에는 큰 피해가 없다. 수세는 좌수도우(좌선수)이고 자좌오향에 좌측에서 들어온 물이 향을 지나 우측 정미방으로 빠져나가니 88향법으로도 자왕향이다. 그 당시에는 88향법이 아직 우리나라에 통용되기 전이지만 좋은 향임에는 분명하다. ‘地理五訣’에서 자왕향은 후손들이 장수하고 인정이 왕하며 발부발귀한다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