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夫永陽志者志永陽之爲郡也曷爲而謂永陽哉蓋永之爲郡郡於二水之陽也按輿地二水曰永也二水發源於普賢母子山一則東滙於紫陽臨皐而爲前川一則西流於新村華東而爲後川肆吾永之所以二水而爲郡者也其位置沿革則辰韓以前本切也火郡或曰骨火曰骨伐國新羅改曰臨皐高麗改曰永州或曰高鬱曰益陽曰永陽本朝曰永川今合新寧爲大郡也之誌也有舊錄倣二州之掌故至若坊里之離合官職之廢置蓋不無時代變更之所致也鄭榮植曺圭燮兩君慨然以編述爲己任發慮採增繕寫一通將以壽傳於郡來問序於余余非有陽秋之筆者而竊有陽秋之彛者也樂爲之序歲在甲戌十月日昌寧曺昇鎬序
고을에 지리지(地理志)가 있음은 나라에 역사서가 있음과도 같다. 여지승람(輿地勝覽)28)이 있은 이래 고을에는 각기 지리지를 두었으니, 우리 영천 또한 영남에 하나의 이름난 고을이다. 〔이곳에는〕 선비와 어진이들의 아름다운 자취가 있고, 산천(山川)이 장대하고 훌륭하여 볼 만하며, 풍토(風土)29)와 요속(謠俗)30)과 누대(樓臺)31)가 밝으며 뚜렷한 것이 가히 전해질만한 실체가 있어 지리지(地理志)를 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라 하겠으니, 〔거기에〕 다시 사실을 더할 것은 없다.
그러나 연혁이 이미 오래되었음을 자세히 돌아보니 거기에는 일어남과 사라짐(생식生息)32)이 있었고, 침잠할 때와 번창할 때(침번寢繁)33)가 있었으며, 위대한 행적과 탁월한 업적이 있었고, 기이한 소문과 이상한 말들을 이어 기록함도 있었다. 이제 음양오행(二五)이 뒤틀리고(추탕推盪)34) 세상의 기운(氣機)35)이 뒤집혀, 급기야는 하늘의 떳떳함을 속이고 사람의 기강이 파괴되어 순박함으로 돌아갈 까닭을 알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모두 마땅히 이때를 〔놓치지 말고〕 뒤쫓아 부지런히(급급汲汲) 순박함으로 돌아가 이 세상과 더불어 같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견해로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게 하고 집집이 이를 존귀하게 높인다면, 이 지리지를 만드는 일은 가히 우리 고을에 한권(一部)의 귀한 역사(돈사惇史)가 될 것이니 이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정형식(鄭瑩植)군이 〔이러한 고을의 현실을〕 개탄하여 드디어 정연소(鄭淵韶), 이창일(李暢一), 조진호(曺振鎬) 등 여러 사람에게 물어 결연히 공(公)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계책으로 이 일에 앞장섰으니, 이는 곧 선배들의 규정을 따르는 것으로서, 그 장소36)는 향교이며 자문을 구할(諏諮) 곳은 곧 여론이리니, 뉘 감히 〔이들을〕 도와서 〔지리지를〕 만드는 일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다만 〔이런〕 일은 참으로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관계로 옛것은 존속시키되 새로운 것을 더하며, 잘못된 것은 고치고 그르친 것은 바로잡는데 있어서 〔결코〕 사사로운 생각에 치우치지 않고, 〔사물을 두루〕 참작하여 공심(公心)을 헤아려 더하며, 올곧은 필치(직필直筆)로 결단하여 때로 인한 손익(損益)과 짐작(斟酌)과 칭형(稱衡)의 올바름을 잃지 않고 의례(義例)를 바로 잡는다면 이 또한 마땅히 하나의 역사를 닦고 전하는 〔전통을〕 세우는 참된 취지〔實旨〕에 부합하는 일일 것이다. 〔이제 지리지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나 일이 마무리되어 나에게 그 전말의 서술을 부탁하는데, 돌아보면 역대로 이어져 온(역세歷世) 선인들의 자취는 모두 이 책 가운데 모두 실려 있어 감히 〔여기에 새로 덧붙일 것은 없지만) 단지 의리상 글재주 없음을 이유로 사양하지 못해 기꺼이 그들을 위해 한마디 덧붙임으로써 이 지리지를 보는 여러 덕망과 학식이 높은 이들(첨군자 僉君子)에게 전하고자 할 뿐이다. 〔갑술년37) 5월 상순 영가(永嘉)38) 후인 권석찬(權錫瓚)이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