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새 둥근 다판이나 비슷한 다판을 사면 금세 해결될 일이지만, 나는 요즘 ‘무엇을 할 권리’보다 가급적 ‘무엇을 안 할 권리’를 누리자는 쪽에 있다. 좀 덜 먹고 좀 덜 사고 좀 덜 버리고 좀 덜 다니는 식의 ‘안 할 권리’를 실천하는 중이다. 있는 것을 활용해 물건을 되살려 쓰는 일도 그 실천 중의 하나일 터이다.
내 눈은 중고물품 직거래 장터 ‘당근마켓’으로 향했다. 21세기 만물상 당근마켓에서 지름 30cm에 높이 4cm짜리 ‘코카콜라 틴 쟁반 트레이’를 발견한 순간,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높이 4cm가 일자형이 아니라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지름이 줄어드는 것이어서 대나무 상판이 2cm 아래쪽 어느 선에서 걸려 고정될 것 같았다. 그 상상만으로 짜릿했다.
사실 실사구시적인 면에서 물받이는 철로 된 것이 가장 좋다. 도자기처럼 깨질 염려도, 나무처럼 누수될 염려도 없기 때문이다. 단점이라면 약한 철제라 쉽게 찌그러질 수는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그 정도 단점은 그 나름대로 특색이라 생각하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됐다. 쟁반 트레이 가격도 착했다. 4,000원. 이 돈이라면 6만 원 하는 둥근 다판값의 12배를 아끼는 셈이었다.
다시 둥근 다판을 살려 차를 시작할 마음에 들떠 물건값을 지불하자마자 물건부터 열어봤다. 아뿔싸, 난감했다. 눈대중으로 봐도 지름이 30cm는 훨씬 넘어 보였다. 트레이를 집으로 가져와 대나무 상판을 올리자 역시나 바닥까지 쑥 들어가 앉았다. 그러고도 둘레 틈이 헐빈하게 남았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이랄까. 트레이도 무용지물이요, 대나무 상판도 여전히 애물단지였다.
짝짝이로 놓인 쟁반 하판과 대나무 상판을 망연히 보고 있자니, 짚신도 제짝이 있다는 속담도, 물유각주(物有各主·모든 사물에는 각각의 주인이 있음)라는 옛말도 실없게 느껴졌다. ‘안 할 권리’를 행하는 게 이렇게도 성가신 일인가도 싶었다. 짝짝이 대나무 상판을 보노라니 불현듯 순망치한(脣亡齒寒·밀접한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이 어렵다는 뜻)이 떠올랐다가, 짝짝이 쟁반 하판을 보노라니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불편해도 참고 산다는 뜻)가 생각났다. 이런저런 생각들은 식자우환(識字憂患)이 아닐런가도 싶었다. ‘그렇다고 둘 다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지름 33cm 쟁반에 맞는 나무 원판을 찾아보기로 했다. 여러 번의 검색 끝에 네이버 쇼핑몰에서 지름 31cm짜리 자작나무 원판을 찾았다. 주로 화판(畫板)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가격은 7,000원. 판매자에게 가운데 지름 2cm짜리 구멍을 6~7개 뚫어줄 수 있냐고 문의했다. 뚫어줄 수 있다고 했다. 공임비로 2,000원이 더 붙는다고 했다. 택배비까지 12,000원이라고 했다. 이 문제로 더 고민 않기로 하고 같은 것으로 2개를 주문했다.
이튿날 바로 배달됐다. 매끈한 자작나무 원판에 구멍 7개가 보기 좋게 뚫려 왔다. 원판을 쟁반에 얹었더니 거짓말처럼 딱 들어맞았다.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다. 다구를 가져다가 올려놓았다. 지름은 3cm 커졌을 뿐인데 28cm짜리 대나무 원판에서 쓸 때보다 훨씬 넓게 느껴졌다.
곧바로 차를 우려 사용해 봤다. 붉은색 철제 물받이에 자작나무 원판에, 모르긴 해도 대한민국에서 유일무이한 다판일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뿌듯하기까지 했다. 끽다(喫茶) 중 불시에 또 하나의 생각이 솟구쳤다. ‘아, 그 퇴수그릇이 있었지.’
7~8년 전 보이차 스승 운경(雲耕) 선생께서 선물해 준 퇴수기 지름이 대나무 원판 지름과 비슷할 것 같았다. 퇴수기를 꺼내와 대나무 원판을 얹었다. 이번에도 거짓말처럼 딱 들어맞았다. 저절로 큰 웃음이 지어졌다. 불식간에 다판이 두 개로 늘어나자 즐거운 고민이 샘솟았다. 둘을 번갈아 사용해도 좋을 일이지만 하나는 선물을 하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몇 해 전 고향집에 가져다준 육각 다함(茶函)이 생각났다. 그 다함 위에 자작나무 둥근 다판을 얹어 쓰면 다함은 다탁(茶卓)이 되니 마침맞겠다 싶었다. 누나와 어머니와 잘 어울리는 다판이라 생각했다.
주말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고향을 찾았다. 찌그러지지 않도록 접이식카트 폴딩박스에 세워 넣었더니 이게 또 기가 막히게 들어갔다. 여기서 또 하나의 영감이 솟구쳤다. 나머지 자작나무 원판은 제값을 주고라도 쟁반 트레이를 새로 사서 캠핑을 좋아하는 형님네에 선물하면 좋겠다 싶었다.
‘무엇을 안 할 권리’를 실천한다고 했지만, 단기간에 실은 참 많은 일들을 했다. 하지만 ‘안 할 권리’의 요지인 낭비 사치 남용의 범위는 잘 지켜냈다. 물질풍요시대니, 물질만능주의니 관성적으로 무감각하게 쓰는 이 말은 뒤집어보면 정말이지 섬찟한 말들이다.
기실 인간들에게 정말이지 이제야말로 작작들 좀 하라는 경고의 소리가 지구촌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다. ‘개판 오 분 전’이란 말이 탄생한 부산의 한국전쟁 통에 사는 대한민국도 아니요, 전 세계 200여 개국 중 11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대한민국에서 ‘할 권리’보다 ‘안 할 권리’를 숙고하고 실천하는 일은 좀 성가시고 괴롭더라도 이제야말로 저마다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다판’ 같은 걸 만들어봤으면 싶다. 스스로 자각 있는 행동을 실천한다는 건 늘 보람된 일이잖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