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이 창의할 때 권규섭 선생은 23세의 나이였고, 전사할 때 24세였다. 그래서 창의지나 유사의 기록이 많지 않은 듯하다. 국가보훈부의 공훈전자사료관에도 공적조서가 매우 짧다. 경북을 만주로 기록한 것은 기록자가 산남의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 까닭일 것이다. 산남의진 네 글자 선양사업이 심히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겠다.
권규섭
자는 인숙이요 본관은 안동이다. 조산대부 행 참봉 덕충의 13세손으로 신녕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평소 담력과 지략이 있었으며 또한 신체의 힘이 좋았다. 나라의 형편이 날로 그릇되는 것을 보고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를 바로잡을 인재들을 구하기를 도모하다가 산남의진의 거사를 듣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 수십 명을 모아 의진에 참여하고 그 좌영장이 되었다. 의병활동으로 두루 여러 고을에 도착함에 반드시 선두에 올라 한 번도 좌절하지 않았으며 과감함과 충성스러움과 믿음으로 이름이 널리 일컬어졌다. 입암 전투에서 여러 장령(將領)들과 함께 같은 시간에 순절하였는데, 권규섭은 순절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원문〉
權奎燮은 字仁淑이요 安東人이라 朝散大夫行參奉德忠十三世之孫也라 世居新寧하다 素有膽略하고 又有力하다 見國勢日非하고 周遊四方하야 以圖匡求라가 聞山南之義擧하고 募同志十數人하야 入陣爲左營將하다 周到列邑에 必先登之하야 一無挫折하여 果敢忠信으로 稱名이러니 至立巖之敗에 與將領으로 同時殉節한이 最是年少矣러라 <山南倡義誌 卷下 35p>
권규섭 의사 약력
권규섭(權奎燮)은 자는 인숙(仁淑)이요 관향은 안동(安東)이라. 신녕(新寧)사람으로 산남의진이 일어날 때 동지 수십 인을 인솔하고 입진하여 좌영장(左營將)으로 활약하다가 입암전(立巖戰)에서 순절하다.
<山南義陣遺史460p> 1991년 애국장 추서. 생몰연대: 1883~1907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
1906.3月 滿洲 永川 新寧에서 起義하여 活動中 山南義陣에 參加하여 活動하였으며 1907.10.7 迎日 立巖 戰鬪에서 壯熱하게 戰死 殉國한 사실이 확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