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열기자 이진원이 쓴 <우리말에 대한 예의>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한글맞춤법 제11항은 “한자음 ‘랴, 려, 례, 료, 류, 리’가 단어의 첫머리에 올 적에는 두음법칙에 따라 ‘야, 여, 예, 요, 유, 이’로 적는다”라고 돼 있다. 그래서 ‘량심, 력사, 룡궁’ 대신 ‘양심, 역사, 용궁’으로 쓰는 것이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具論會, 金龍洙, 田麗玉”은 모두 ‘구론회, 김룡수, 전려옥’이 아니라 ‘구논회, 김용수, 전여옥’으로 쓴다.” 332쪽
“반대로, 이름 첫 자가 아닐 경우에는 원래 소리대로 불러야 한다. ‘金德龍, 李厚洛, 鄭淸來’를 ‘김덕용, 이후낙, 정청내’가 아니라 ‘김덕룡, 이후락, 정청래’로 써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응노’도 ‘이응로’가 옳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당연히 ‘이응로’로 올랐다. 그런데도 ‘이응로 서예전’이 열리는 곳을 그들 스스로 ‘이응노미술관(*)’이라고 한다고 한다. 맞춤법도 법인데….” 333쪽
*이응노미술관은 대전에 있다. 포털을 검색하면, 말법과 무관하게 ‘이응노미술관’으로 안내돼 있다.
고유명사로 ‘이응노’라고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겸양한 학자’인 교열기자 이진원은 이런 생각도 바로잡아 준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교열자란, 천재의 붓에 한층 광채를 곁들이는 데 능란한 겸양한 학자이다”고 찬양한 바 있다.
““이름은 고유명사이니 본인이 원하는 대로 써 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하는 질문이 있었다. 물론 그런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이런 예외를 인정하면 말글살이가 혼란스러워진다. 게다가 되레 당사자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金利龍’이란 이름에 두음법칙을 적용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면 규칙성이 없어져서, 본인이 말해 주기 전엔 ‘김이용, 김이룡, 김리용, 김리룡’ 가운데 어느 게 맞는 이름인지 알기 어려워진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게 복불복이라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334쪽
이어지는 문장이 ‘겸양한 학자’의 적확한 지적인데, 들어보자.
“사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써줘야 한다’는 말은 ‘본인이 원하는 표기를 모를 땐 제대로 된 표기를 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이게 말이 될 법이나 한 말인가?” 334쪽
이 때문에 한글맞춤법 제11항에는 한 가지의 허용규정과, 한 가지의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
‘외자로 된 이름을 성에 붙여 쓸 경우에 본음대로 적을 수 있다.’(허용)
이에 따라 ‘申砬, 崔麟, 河崙’은 ‘신립, 최린, 하륜’으로 적을 수 있다.
*한때 ‘柳成龍’을 ‘류성룡’이 아닌 ‘유성룡’으로 쓸 수 있다고 논란이 인 적이 있다. 두음법칙을 잘못한 적용한 결과로, 이는 바루어졌다. 한편 대구한국일보 대표가 유명상(劉命相) 씨인데, 모금도 류(劉) 자를 성씨로 사람들은 모두 ‘유’ 자로 표기한다. 이는 족벌체제가 낳은 기형이 아닌가 싶다. ‘류성룡’이나 ‘류명상’이나 모두 ‘류’로 표기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적는다’가 아니라 ‘적을 수 있다’는 것은 ‘신입, 최인, 하윤’으로 쓰는 게 원칙이라는 뜻이다.
‘한글맞춤법 제11항이 한자음에 관한 규정이란 것은 결국 순 우리말이나 외래어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예외)
때문에 이루마, 이루다, 이루지, 이로운, 유리해, 주리라 같은 순 우리말 이름은 문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우한용 선생님이 진단한 우리 시대의 특징과 한글맞춤법 제11항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1998년 외환위기 때 소설 <아버지>로 대박을 터뜨렸던 김정현 씨가 경주 무덤 발굴을 모티브로 쓴 <황검보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매일신문 서울정치부장 직을 내려놓은 뒤 경북 안동에 터를 잡고 유기농비료를 만들어 팔면서 출판사 사장과 작가, 강연자, 칼럼리스트 등 다역을 소화해내고 있는 서명수 선배는 신간 <천년의 기억, 우리들의 경주>에서 “우리 국민의 DNA는 신라에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는데, 김정현의 <황검보검> 92쪽은 서명수 선배가 말한 자랑스러운 유전자와의 모순(矛盾)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순이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사의 실체이지 않을까, 나는 그리 파악한지 오래다. 그 모순되는 대목을 읽노라니, 유명연예인 박수홍과 그 부모 간 치떨리는 싸움행각, 짝짓기 프로그램 <나는솔로다>의 돌싱특집 출연자 ‘영숙’의 인간 망종적 언행, 이준석과 안철수의 같잖은 쟁쟁거림, 하루가 멀다 하고 튀어오르는 인면수심의 엽기적인 사건사고들, 무엇보다 너무나도 태연자약해서 너무나도 절망적인 기하급수적인 청소년 범죄들… 이런 것들이 줄을 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 상식(常識)이 깨지고 의문시 않던 근본(根本)이 무너졌음을 심각하게 목도한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시대의 관념(觀念)들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도 유효하지도 않다고 체감한다. 관념 근본 상식은 한 사회의 정신을 지탱하는 근간일진데, 이것들이 저 극지방 빙하 녹듯 우르르 허물어져 깨져버렸다는 것은 한 국가의 명운이 다한 것인진데, 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