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현실은 무법(無法)시대로 보이지만 적확하게는 전법(錢法)시대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법은 엄연히 살아있지만, 금권 로비로 법망을 피할 수 있고, 금권을 이용해 유능한 변호사를 쓰면 죄를 경감받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버젓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돈맛을 본 민중은 그야말로 돈맛에 미쳐버렸다.
이런 중에 마약복용 문제가 시국사건으로 등장했다.
가족 개념을 친인척으로 넓히면 대한민국 가정의 가족 중 “마약을 복용하지 않는 가족이 0일 확률”은 “거의 제로(0)에 가깝다!”는 게 현주소이다. 문제는 마약복용 연령대가 청소년층으로 급속히 하향평준화되고 있다는 것이고, 마약은 한번 손을 댔다 하면 개인은 물론 한 가정이 풍비박산되는 단초가 된다는 점이다. 마약복용은 은밀한 곳에서 성행하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이 복용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찌들대로 찌들어, 결국 중독자가 죽어야 마약과의 싸움도 끝이 나는 게 현실이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는 마약이 청소년과 20대에서 성행한다고 하니, 머지않을 미래가 참으로 끔찍하기만하다. 그런데 마약 역시 ‘돈지랄’이다. 마약 가격은 천차만별이고 중독이 심해질수록 고가의 마약을 찾는다고 하니, 아예 돈이 없거나 돈의 가치를 모르고 산다면, 마약 문제가 시국사건이 될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물질만능주의는 정신의 가치를 무마시키고 희석시켰다. 물질과 정신의 조화는 인류사와 인간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물질은 9의 가치로 정신은 1도 안 되는 가치로 여긴 지난 40년 세월이 앞선 수천 년의 유구한 인생살이들의 전형을 전복시켜버렸다.
인간의 크고작은 싸움은 그 시대의 산물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전쟁을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도 그 리얼리티를 능히 체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 전쟁이 정전(停戰) 중인 우리에게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했다.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한다. 결국 인류사라는 것도, 인간사라는 것도, 개인사라는 것도 당대가 그린 ‘마음지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외할머니가 즐겨쓰시던 “장난이 난이 된다”는 옛말은 아이들 불장난에 집채가 잿더미가 되고, 큰산이 벌거숭이가 되는 인간사 이치를 적실히 담은 말이다. 어떤 마음을 내어 어떤 지도를 그릴 것인가 하는 것이 중한 줄만 알아도 세상은 또 한 번 뒤집어질 수 있다. 이번에는 다분히 ‘인간답게’ 말이다.
구한말 동학(東學)을 비롯해 신흥종교들이 솟구칠 때, 이구동성으로 선천세계와 후천세계를 나누어 이야기한 까닭은 이상세계 동천(洞天·대동사회)을 향한 염원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재야사학에서는 우리나라 근대화를 이끈 1970년대 새마을운동 정신의 뿌리를 1860년 창도한 동학에 있다고 본다. 또 동학의 뿌리는 신라(혹은 삼국)의 낭도정신에 있다고 본다. 그 낭도정신의 뿌리는 단군조선의 홍익인간 재세이화(弘益人間 在世理化)에 있다고 본다.
근면 자조 협동을 근간으로 한 새마을운동 정신을 누가 거칠다고, 점잖지 못하다고, 형편없는 것이라고,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동학이 지향한 사인여천(事人如天·한울님을 공경하듯이 애나 어른이나 노인이나 여자나 그와 똑같이 공경하고 존경하여야 한다)을, 삼국이 공히 가졌던 낭도정신(핵심은 심신수련, 이를 신라 천재 최치원은 풍류도라 했다)을, 이 나라 건국정신인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누가 이롭지 못하다고 할 것인가.
우리 안에 이로운 것, 가치있는 것, 아름다운 것을 헌신짝 버리듯 패대기쳐버리고 평안과 안녕을 기대할 수야. 아!
4.
앞서 인용한 <우리말에 대한 예의>는 엊그제 이웃 아파트 주민에게서 나눔 받은 책이다. 이 주민은 대전교육청에 계시는 분으로 책 보는 취향이 비슷한 까닭에 당근마켓으로 수 번 거래했고 통성명도 하게 됐다. 어느 때부터 어떤 책은 사고, 어떤 책은 그냥 받기도 한다. <우리말에 대한 예의> 뒤쪽 날개에는 비슷한 류의 책 두 권이 소개돼 있다. <우리말 풀이사전>과 <책의 敵>이다. 앞에 것은 다시 살려 써야 할 우리 옛말 600개를 표제어로 삼은 것이고, 뒤에 것은 서지학의 고전이라고 짧은 설명이 달려 있다. 두 책 모두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주문했다. 앞에 것은 ‘옛말 600개’에 꽂혀서, 뒤에 것은 조선시대 이덕무 선생 같은 서치(書癡)도 아니고,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 식의 독서가도 아닌 ‘빅토리아 시대 출판인의 고전 사랑’에 꽂혀 주문했다.
<책의 敵> 뒤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정확히 말해서, 고서를 소유한다는 것은 신성한 의무를 다한다는 것이며, 소유자나 관리자가 알면서도 이 의무를 무시한다면 이는 마치 부모가 어린 자식을 돌보지 않는 것과 같다. 책의 주제나 가치가 어떠하든지 간에, 고문헌은 그야말로 소중한 국가 유산의 하나다. 고문헌을 비슷하게 복제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똑같게 만들어 낼 수는 없으므로, 역사적 자료로서 소중하게 보존해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