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93다시 봄이다. 온라인은 연일 총선과 관련된 세력다툼거리를 가십으로 다루고 있다. 정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은 인간사회에 속해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인간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조건은 제대로 된 정치구현과 함께 개개인의 공동체의식이 조화를 이룰 때이다. 그런 까닭에 ‘나’ 이외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나’의 사회, ‘나’의 공동체이니까….禹在龍 義士 略歷(우재룡 의사 약력) ⑦독립유공자 공적조서③대구 동화사 근거지로 경북에서 20여 차례 일본군과 전투정환직 대장이 순국하자 선생을 비롯한 산남의진의 의병장들은 최세윤(崔世允)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최세윤 대장은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지구전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경상도 일대에 각 책임자를 배정한 후 소부대로 유격전을 펼치기 위해 의진을 재편성했다. 선생은 의진의 전략수정에 따라 영천 서부지역의 책임을 맡았다. 선생은 동화사(桐華寺)를 근거지로 삼고 팔공산(八公山) 일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산남의진은 1908년 2월부터 7월까지 경북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20여 차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908년 7월 최세윤 대장이 일본군에 체포되고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더 이상 활동을 전개하지는 못했다. 선생도 이 시기 일본군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체포 일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선생은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다. 선생의 옥중 생활의 시작이었다.선생은 합방특사(合邦特赦)로 풀려났으나 일제의 감시가 계속되면서 은거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은거 중이던 선생은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제자인 박상진(朴尙鎭)과 만나면서 다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박상진은 울산 출신으로 스승인 허위가 의병전쟁 중 순국하자 그의 뜻을 계승해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과 함께 산남의진에서 활동했던 양제안(梁濟安)의 소개로 박상진이 직접 선생을 찾아온 것이다. 선생은 박상진의 독립운동 방략을 듣고 함께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선생은 이때부터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했으며, 1914년에는 거처를 박상진이 거주하고 있던 경주 녹동으로 옮겨 광복회 조직에 착수했다.선생은 1915년 7월 15일(음력)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 결성에 참여했다. 광복회는 한말 의병계열과 계몽운동계열이 연합해 결성한 국내비밀단체였다.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통치로 민족운동세력이 크게 약화된 시기였다. 민족운동 주체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국내독립운동은 침체된 상황이었다. 광복회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국내 민족운동세력들을 규합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던 단체였다.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단체인 독립의군부, 풍기광복단, 민단조합, 달성친목회, 조선국권회복단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들도 참여했다. 광복회 결성에 참여한 이들은 이념과 투쟁노선이 달랐으나 독립이라는 목적 아래 연합할 수 있었다.광복회는 독립을 위해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이 준비되면 일제와 전쟁을 치르려고 했다.. 이를 위해 한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농토를 개간해 식량과 병력을 공급할 계획을 수립했다. 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 4대 행동강령 아래 다음과 같이 투쟁 강령을 채택했다.①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日人)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② 남북만주에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③ 종래의 의병 및 해산 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④ 중국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⑤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대구)에 두고, 한(韓)·만(滿)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 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⑥ 일인(日人)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 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⑦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日人)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