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에 가면 남평문씨의 세거지로 이름난 인흥마을이 있는데 인흥이란 지명은 과거 이곳에 자리 잡고 있던 인흥사란 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인흥사는 고려원종 때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11년간이나 주지로 있었던 곳으로 유명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빈 터로 남아 있다가 남평문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한다. 남평문씨는 목화씨로 유명한 삼우당 문익점을 중시조로 하는데 후손이 처음 대구에 거처를 잡은 것은 대략 500여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곳 인흥리의 입향조는 그의 18세손인 문경호(1812~1874)다. 그는 이곳에 문씨들만이 거주하는 마을을 계획하였고 1800년대 중반에 저택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그 후 100여년에 걸쳐 지금의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9채와 정자 2채를 포함하여 70여 채의 기와집을 보유하고 있어 대구시가 민속마을 제 3호로 지정한 마을이다. 건축 년대는 대체로 200년 미만이지만 전통적인 영남지방 양반가옥의 틀을 지키고 있으며 세거지 구성과 주변경관의 조화가 뛰어난데 특히 도로에 접한 부분에는 돌담을 쌓아 정겹고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했다. 이 마을은 고풍적인 분위기가 빼어나 영화 ‘황진이’ ‘씨받이’등 사극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며 그림엽서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제법 큰 건물 수백당(수봉정사)이 있는데 이 건물은 주로 손님을 맞이하고 일족의 모임이 있을 때나 문중의 자재들이 학문을 논할 때 사용하던 정자로 당시 이 마을의 경제력과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문중의 문고인 인수문고는 수 만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고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광거당 등 다른 마을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건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 마을은 비슬산에서 한쪽지맥이 북쪽으로 뻗어 나와 다시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마을 뒤 천수봉(215m)을 일으켰다. 천수봉은 금형으로 마을의 부를 기약하기에 충분하고 그 밑으로 아늑하고 양지바른 곳에 주택이 들어서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천내천이 흐르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형국이다. 그러나 마을의 좌우측을 감싸주는 청룡백호가 본신의 용이지만 짧거나 벌어져 마을의 기운이 그대로 새어 나가는 풍수적 단점을 가지고 있으나 다행이 외청룡자락이 마을을 잘 감싸주고 있다. 이 마을 입향조인 문경호는 그 당시 백호자락의 끝이 벌어져 마을의 생기를 가두어주지 못한다 하여 마을 앞 백호자락 안쪽으로 소나무 300그루(송림)를 심어 비보(裨補)하였으나 지금은 대부분 고사하고 많이 허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이 마을은 양택의 3요결인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전저후고(前低後高)는 잘 갖추었으나 앞이 좁고 뒤가 후덕한 전착후관(前窄後寬)의 조건은 갖추지 못했다. 풍수에서는 양택지 선정 시 ‘전착후관부귀여산前窄後寬富貴如山’이라 하여 수구와 같이 앞이 좁으면서 뒤가 후덕하면 부귀가 산처럼 쌓인다고 하였는바 나름 풍수적 길지를 갖추려고 마을 앞에 비보 숲을 조성하고 조산모대기(돌무덤)를 만드는 등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