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비가 많은 봄날이다. 진즉에 물가 버들개지에 물이 올랐고 복수초며 영춘화가 노란 꽃잎을 자랑하고 있다. 머잖아 각색의 봄꽃들이 화려하게 산천을 장식할 것이다. 누구나 상춘(賞春)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봄이었으면 좋으련만, 4월은 정치로 인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계절이다. 정치인들이 서로의 장점을 부추키면서 화합해서 백성(百姓)을 위한 정치를 할 수는 없을까? 투쟁의 역사로 만들어가는 인간사회에서는 불가능할까? 생각이 많은 봄이다. 禹在龍 義士 略歷(우재룡 의사 약력) ⑧광복회 조직하여 지휘장을 맡고, 만주 길림에도 지회 건설 광복회는 독립전쟁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도 군대식으로 만들어, 본부에는 총사령(박상진), 지휘장(우재룡, 권영만), 재무부장(최준), 사무총괄(이복우)로 구성하고 국내외로 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전국에 광복회 지부를 설치했으며, 상업조직으로 위장한 연락기관을 국내와 만주에 설치했다. 선생은 군자금 모집과 국외 연락책임자로 일했다. 선생은 대동상점을 운영하고 있던 권영목(權寧睦)이 제공한 비용으로 길림에서 손일민(孫一民), 주진수(朱鎭洙), 양재훈(梁載勳), 이홍주(李洪珠) 등과 함께 1915년 12월 길림 광복회를 설치했다. 선생은 박상진과 함께 광복회 결성을 추진하면서 만주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광복회가 결성된 후에도 계속해서 만주와 국내 연락을 책임졌고, 박상진은 선생에게 만주 본부인 길림 광복회 설치를 맡겼던 것이다. 길림 광복회 설치는 광복회 결성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국내지부가 설치되기 이전이었고, 조직을 정비하고 확대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길림 광복회를 빠른 시점에 설치한 이유는 광복회 지도부가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만주 조직 필요성의 시급함을 인식한 결과였다. 길림 광복회의 성격은 선생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박상진과 비밀히 국권회복을 목적하야 다수한 동지를 모집하여 대정 육년 유월경에 당시 박상진의 집에서 광복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동회 본부를 중국 길림 지방에 설치하고 조선 지방에는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며 길림 본부에서는 군대를 양성하고 병기를 사드리어 한편으로는 조선 안에 있는 각 지부에 배부하여 무력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와 같이 큰 단체를 설치한 운동비도 우리견이 각 지방에서 현금 칠천만원을 모집하야 당시 봉천에 있는 김좌진을 주고 김좌진을 추천하야 회장을 삼고 독립운동을 하든 터인데 선생이 중심이 되어 설치한 길림 광복회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령부였다. 광복회는 무장투쟁을 위한 사관학교 설립과 군대양성을 실현하기 전에 가장 먼저 만주 본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길림 광복회를 설치했던 것이다.’<동아일보> 1921년 6월 11일자, [장승원을 총살한 광복회원 우리견]세금 운송하는 우편마차 공격해 광복회 군자금 확보 선생은 광복회 군자금 모집에도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을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광복회는 1915년 12월 경주에서 우편마차를 공격해 8천7백원을 탈취하였다.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慶北郵便馬車暗襲事件)’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지휘장인 선생과 권영만(權寧萬)이 주도한 것이었다. 경주에서 대구로 세금이 운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선생과 권영만은 총사령 박상진이 제공한 권총을 휴대하고 세금운송마차 공격을 계획했다. 먼저 권영만은 환자로 가장해 우편마차 주인집에 숙박하고 대구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핑계를 내세워 우편마차에 동승했다. 선생은 운송마차를 정지시키기 위해 경주 광명리 효현교(孝峴橋)를 파괴하고 마차를 기다렸다. 그리고 우편마차가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틈을 이용해 권영만과 함께 세금을 탈취한 것이다. 광복회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전국의 자산가를 조사하고 이들에게 의연금을 요구하는 포고문을 발송했다. 포고문 발송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만주에서 발송했는데, 선생은 국내에서 작성된 부호의 명단과 포고문을 만주로 가져가 발송했다. 광복회는 포고문의 효력을 높이기 위해 친일 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경북 칠곡의 장승원(張承遠)과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여 친일세력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의 반격도 만만찮아 1918년 8월 무렵에는 지도부를 구성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다. 선생은 다행히 국외로 탈출해 체포를 피할 수 있었고, 잠시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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