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구자는 운경이며 본관은 여강으로 이한구의 족제(族弟)이다. 서기 1906년 창의(倡義) 때에 맨 먼저 의병진에 가담하여 마음과 힘을 다해 험하고 어려움을 다 감당하였다. 이한구가 마침내 청송에서 의병을 모으고 대적할 때 적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치료하던 중 집에서 죽었다. 이에 한구는 곡을 하며 다가서서는 “끝내 앞선 시대의 성스러운 임금의 땅을 지키려 맹세하더니 이치에 밝은 처사의 깃발을 모시네.” 등의 구절로 만시(挽詩)를 지었다.〈원문〉李景久는 字雲卿이요 驪江人이라 李韓久之族弟也라 丙午之倡에 首先從之하야 盡心竭力하고 不避險難이런이 韓久方召募於靑松時에 中敵彈하야 重傷而卒於家하다 韓久哭而臨之曰終誓先王土하니 倍明處士旌이란 等句로서 挽之하다 <山南倡義誌 卷下 39p>李景久 義士 略歷(이경구 의사 약력)李景久(이경구)는 字(자)는 雲卿(운경)이요 관향은 여강이라 丙午年(병오년)에 입진하여 청송 등지에서 군인과 군수품을 모집하다가 적들과 교전되어 순사하다. <山南義陣遺史461p>남석우자는 주로, 본관은 영양이며 경재 천주의 후예이다. 대대로 청송에서 살았는데 담력과 지략이 보통 사람보다 빼어나 생계를 돌보지 않고 처음에는 청송군의 약포장(約炮長)이 되어 도적들을 제거하였으나 서기 1906년의 사건이 일어나자 마침내 스스로 의병진으로 나아가 우익장이 되었다. 적에게 붙잡혀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고 대구의 감옥에서 서기 1906년 병오 6월 10일에 죽음을 맞이했다. 미망인 이씨는 그의 남편이 평소 수집했던 군기(軍器)를 산남의진의 군감인 정옥기에게 인도하고 죽은 남편의 남긴 한을 후세에 전했다 〈원문〉南錫佑는 字周老요 英陽人이라 敬齋天柱之后라 世居靑松하다 膽略이 過人하야 不事産業하고 初爲靑松約長하야 除盜賊하고 丙午之事起에 遂許身赴之하야 爲右翼將하다 被執不屈하고 死於大邱獄하니 時丙午六月十日也라 未亡人李氏는 其夫平素召募之軍器를 因山南陣軍監鄭基하야 引渡하고 亡夫의 遺恨을 傳於世하다 <山南倡義誌 卷下 39p>南錫佑 義士 略歷(남석우 의사 약력)南錫佑(남석우)는 字(자)는 周老(주로)요 관향은 英陽(영양)이라 靑松郡(청송군)에 約炮長(약포장)으로 있었고 山南義陣(산남의진)에 들어와서 左翼將(좌익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고 公(공)의 未亡人李氏(미망인이씨)는 亡夫(망부)의 遺命(유명)으로 엽총 四十(사십)여정을 山南義陣(산남의진) 軍器監(군기감) 鄭沃基(정옥기)에게 인도하다. <山南義陣遺史461p>남석우 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경북 청송(靑松) 출신이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황제는 측근의 인물에게 밀명을 내려 각처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때 신암 노응규(愼庵 盧應奎)와 동엄 정환직(東 鄭煥直)은 황제의 밀명을 받고 의병운동을 직접·간접으로 조종하였다. 특히 정환직의 아들 정용기(鄭鏞基)는 고향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의병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남석우는 바로 정용기의 휘하에서 영양·봉화를 담당하여 의병운동의 지역적 확산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남석우는 이 지역에서 이세기(李世紀)와 더불어 유기적 활동을 꾀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의병운동이 지역적 확산과 대중적 기반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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