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포켓(22)사람들은 저마다 염두에 둔 갈 곳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갈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만으로, 신기했다. 어쩌면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본연의 삶에 갇혀있다는 것을 저마다 부정하며 살아 갈 것이다. 가고 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지만, 어차피 의식주라는 큰 틀 안에서 인간은 옷과 음식과 집이 필요충분에 의한 조건으로 대두되기 마련이다. 거역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곧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드는 쳇바퀴 안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인력에 의해 끌어당기는 힘은 존재되기 마련이다. 그래야만 이 도시가, 이 나라가 허접하지 않게 굴러갈 것이다. 나는 지금 서화인에게로 간다. 집에 간다고 해도 틀리지 않지만 분명 옆집에 살고 있는 서화인을 향한 발걸음이 먼저이기에 속일 수 없다. 분명하고 반듯한 걸음이 말해주고 있다. 왠지 꾸깃꾸깃한 하루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자국에서 서화인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온몸으로 조율해주리라. 내 손길 따라 음률과 음색이 달라지는 서화인에게 튜닝해머 같은 작은 수공구보다 간절한 것은 부딪히는 체온이었다. 허락된 공간에서 허락된 알몸으로 허락된 한 몸이 될 것이다. 집 앞 슈퍼를 지나려고 할 때 순식간에 확대되어 들어오는 차량 한 대가 있었다. 모아비 4륜구동 차였다. 흔하지 않다는 생각에 차번호를 빠르게 담았다. 그렇다고 서화인 남편을 부딪친 음주운전 차량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번호판을 봤을 뿐 그날 외우고 있는 차량번호는 없었다. 밤이었고 길가 풀숲에 은닉하고 있었던 초라한 모습이 유일했다. 목격자가 없다는 확신이 들자 뒷좌석에 피해자를 싣고 뺑소니친 모하비 4륜구동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인근에 저런 차량은 흔하지 않다고 직감했다. 한번쯤 의심해 봐도 괜찮을 듯싶었다. 모하비는 큰길 쪽으로 멀어져갔고, 서화인의 알몸 생각으로 다시 내 몸은 뜨거워졌다. 과일가게에서 딸기 한 팩을 까만 봉지에 담아 덜렁덜렁 서화인 집 초인종을 눌렀다. 힐끗, 내 집은 방문객이 없었는지 서화인을 기다리며 쳐다보았다. 광고스티커만 몇 장 늘어난 것 외엔 별다른 낌새를 찾을 수 없었다. 하긴 있을 턱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화인의 문이 열렸다. “촌스럽게 까만 봉지 들고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화인 입술을 덮쳤다. 문을 닫고 잠그면서 내 입술을 받아주고 있었다. 까만 봉지는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져두고 허겁지겁 옷을 벗었다. “누가 좇아와요? 왜 이렇게 서둘러요.”누가 좇아오는 건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다급해진 자신의 마음에 좇기는 것이 촌각을 다투는 더 큰일처럼 느껴졌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죄다 벗은 나는, 서화인의 옷을 강약조절도 하지 않고 벗기기 시작했다. 단추가 뜯겨나는 소리이거나 찢기는 소리 같았지만 무시하고 발정 난 수캐마냥 덤벼들었다. 서화인은 그다지 싫지 않은 표정으로 덤덤하게 받아주고 있었다. 마침내 천 조각 하나 없는 벌거숭이가 되었을 때 속살 하얀 자갈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얼키설키 서로를 찾아 나서고 있었다. 빈자리마다 간질거리면서 속삭이는 수천의 핏줄이, 서로의 가슴에서 발원하여 뻗어가다가 낯익은 체취에서 잠시 머물고 그래서 우는구나. 우는소리 정겹구나. 아아, 당신이라는 아득한 별이 하루살이 떼처럼 달려들어 충족 속에 빠트리고 가득 새겨질 내 몸을 저당 잡힌다. 나는 지금 죽어도 좋다며 서로의 알몸을 끽끽 흔들다가 잠이 들고 싶은 저녁 어디쯤에 다다라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