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적으로 보아 영남의 4대길지에 속하는 경주 양동마을은 본래 안강현이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어진선비들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라 하여 양동(良洞)or 양좌동(良佐洞)으로 불렀다. 그런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가 되었다. 이곳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고 봉화의 닭실마을, 안동 임하의 내앞마을과 더불어 영남의 4대 길지이기도 하다. 양동마을은 조선 초기 손소(1433~1484)가 이곳에 정착한 이래 그의 후손인 월성손씨와 그들의 외손인 회재 이언적(1495~1533)의 여강이씨가 같이 살고 있는 집성촌부락이다. 2006년에 발간된 경주시지(양동민속마을)에 의하면 여기 두 문중에서 조선조에만 문과급제 26명, 무과 14인, 사마시에 76인이 급제하였고, 근래 들어서도 장관 2명과 더불어 판검사 30인 등 수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니 이러한 발복은 마을의 풍수적 입지조건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양동마을은 풍수형국상 물(勿)字 형국의 명당으로 마을 뒤 설창산(163m)으로부터 4개의 산줄기가 내려오는데 첫 번째 줄기에는 향단(香壇)과 끝자락에 관가정(觀稼亭)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물(勿)字 형국에서 장풍과 더불어 지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줄기인데 두 번째 줄기에는 여강이씨의 종가집인 무첨당(無添堂) 그리고 세 번째 자락에는 월성손씨의 서백당(書百堂)이 자리하고 있다. 서백당은 양동마을의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가 1454년(성종15)에 건축한 전통가옥으로 월성손씨의 종택이다. 이곳에서 조선중기 문신이자 청백리인 우재 손중돈(1463~1529)과 조선조 최고 유학자로 손꼽히는 회재 이언적(1494~1553)이 태어났다. 따지고 보면 손소 역시 이 지역의 만호(萬戶) 류복하(柳復河)의 무남독녀에 장가들어 처가 곳으로 이거해 정착하였고 회재 선생도 손소의 외손이 되니 이 마을은 외손의 발복지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이래서 과거에 ‘양동 처녀면 선도 안 보고 데려 간다’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또한 서백당에는 삼현출생지지(三賢出生之地)라 하여 성현이 3명이나 태어날 수 있는 풍수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 아직 태어나지 않는 마지막 한 인물은 꼭 손씨 가문에서 태어나게 하고자 했다. 손중돈과 이언적 모두 외손이므로 문중에서는 ‘남 좋은 일만 시켰다’하여 이 후에는 시집간 딸들에게 해산을 위한 서백당 출입을 금지시켰다고까지 한다. 이 마을의 전체적 풍수입지조건을 살펴보면 양택지의 기본조건인 배산임수(背山臨水)와 더불어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조건을 갖추었고, 수세(水勢)는 마을 앞에서 흐르는 기계천과 안강에서 올라오는 칠평천이 경주에서 올라오는 형산강과 만나 삼 합수를 이룬다. 특히 형산강은 남에서 북으로 마을을 향해 오는 역수형국으로 이 모두가 마을에 큰 부를 가져다주는 수세조건이다. 그리고 마을 앞에 보이는 성주봉은 수려하면서도 뾰족한 문필봉으로 양동 마을에 훌륭한 문사(文士)가 태어날 것을 미리 예언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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