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석인자는 우팔, 본관은 영양으로 경재 천주의 후예이다. 평소에 뜻과 절조가 있었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처음에는 남석우의 군포(郡炮)로 종사하였다가 병오년의 창의에 눈물로 맹세하고 의병진에 종군(從軍)하였다. 서기 1907년 정미 봄 산남의진에서 지휘의 임무를 받아 이세기와 더불어 여러 고을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수집한 군기(軍器) 등 물건들을 동대산과 보현산 두 산의 가운데 묻어두었다가 사실이 누설되어 두 사람이 동시에 붙잡혔다. 이세기는 힘이 좋은 사람이라서 호송되는 도중에 탈출하고 남석인은 혼자 대구 감옥에 갇혔는데 적이 군기 등 물품을 갈무리해 둔 장소를 탐지하고자 비록 남석인을 무한 회유하였지만 끝내 항복하지 않고 감옥에서 죽었는데 그때가 서기 1907년(음력) 9월 15일이다. 당시 사람들이 남석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말하기를 “청송의 의로운 선비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원문〉 南錫仁은 字禹八이요 英陽人이요 敬齋天柱之后라 素有志節하야 天下大亂에 爲南錫佑軍炮從事而丙午之倡에 誓涕從軍하다 丁未春에 受大陣之指揮하야 與李世紀로 召募於列邑하고 貿軍器等物하야 貯藏於東大普賢兩山之中이라가 事泄하야 二人이 同時被執하야 世紀는 有力人也라 中途脫還하고 獨繫於大邱獄하야 敵이 欲探藏處하야 雖無限誘之나 終不服하고 死於獄하니 時丁未九月十五日也라 時人이 哀惜曰靑松之義士死矣라 하다 <山南倡義誌 卷下 39p> 南錫仁 義士 略歷(남석인 의사 약력)南錫仁(남석인)은 字(자)는 우팔(禹八)이요 관향은 英陽(영양)이라. 敬齋(경재) 諱天柱(휘천주)의 후예요 靑松(청송)에 世居(세거)하였고 형세가 부유하였다 원래 천성이 관후하고 기질이 활발하여 구구한 생업에 마음을 두지않고 공중을 위하는 사업에 주력하더니 나라형세가 기울어지고 백성의 정도가 크게 소란되는 것을 보고 당분간 효과라도 구제코저하여 종형 錫佑(석우)의 창설인 청송군집포진에 가담하여 민요수짐에 노력하였다 丙午年(병오년) 山南義陣(산남의진)이 일어날 때 경상도 각 군에 활동인원을 배정하매 公(공)은 서종락(徐鍾洛)·남석구(南錫球)·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 몇몇 동지를 더불고 청송군내의 군인징발과 물자수집에 책임을 지고 노력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山南義陣(산남의진) 대장 鄭鏞基(정용기) 대구에 체수되고 중군장 李韓久(이한구) 영덕에서 부서를 다시 편성할 때 公(공)은 炮隊將(포대장)으로 임무를 맡고 활약하였다 丁未年(정미년) 봄에 山南陣(산남진) 본부 촉탁으로 李世紀(이세기)를 더불고 청송군에 들어와서 군수물자를 수집하여 보현산과 동대산에 저장하다가 적에게 피집되어 世紀(세기)는 중도에 도탈되어 돌아오고 公(공)은 大邱(대구)옥에 감수되어 殉節(순절)하다 時丁未九月十五日也(시정미구월십오일야)라. 公(공)의 死刑(사형)이 판결된 증거「大韓帝國官報 隆熙元年十一月十九日土曜日 大韓帝國政府慶尙北道裁判所判事 李忠求의 質稟書 被告南又八 供稱我韓三千里疆土를 日本人이 來侵하야 五百年遵守하던 衣冠文物을 變更함을 見하고 憤氣所激에 日本人을 退斥할 思想이 有 (略) 法部大臣이 上奏하와 奉旨依奏(대한제국관보 융희원년십일월십구일토요일 대한제국정부경상북도재판소판사 이충구의 질품서 피고남우팔 공칭아한삼천리강토를 일본인이 내침하야 오백년준수하던 의관문물을 변경함을 견하고 분기소격에 일본인을 퇴척할 사상이 유 (략) 법부대신이 상주하와 봉지의주)⌋ <山南義陣遺史461~4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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