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종일 비가 내리고 오늘 아침 하늘이 맑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아름답다. 산 아래 벚꽃들은 하얀 꽃눈이 되었고, 산 중턱은 초록의 신록과 점점이 펼쳐진 산 벚꽃들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수채화다. 눈이 호강하는 딱 지금이다.어제 종일 비가 내리고 오늘 아침 하늘이 맑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아름답다. 산 아래 벚꽃들은 하얀 꽃눈이 되었고, 산 중턱은 초록의 신록과 점점이 펼쳐진 산 벚꽃들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수채화다. 눈이 호강하는 딱 지금이다. 어제 종일 비가 내리고 오늘 아침 하늘이 맑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아름답다. 산 아래 벚꽃들은 하얀 꽃눈이 되었고, 산 중턱은 초록의 신록과 점점이 펼쳐진 산 벚꽃들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수채화다. 눈이 호강하는 딱 지금이다. 남석인 의사의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는 산남의진 항의지나 유사의 기록과 자못 다르다. 의진에 참여하였으나 지휘부와 뜻이 맞지 않아 독자적 행보를 했다는 위주로 조서를 작성했으니, 일본군의 심문조서에 근거한 탓이 아닌가 싶다.
남석인 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
1878년 4월 12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도평리(道坪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英陽)이며, 자는 우팔(禹八), 이명은 우팔(又八)이다. 임진왜란 때 남계조(南繼曺)가 청송에 입향한 이래 그 후손들이 현동면 일원에 거주하고 있었다. 현동면 출신 영양 남씨 15명이 산남(山南)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1896년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남승하(南昇夏) 등과 함께 청송(靑松)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 등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 후 남석우(南錫佑)의 포군에서 종사(從事)로 활동하던 중,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906년 3월 고종의 시종관 정환직(鄭煥直)의 아들 용기(鏞基)가 경북 영천에서 산남 의병부대를 일으키자, 청송지방의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서종락(徐鍾洛)·남석구(南錫球)·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과 모병 활동을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06년 4월 산남 의병부대 대장 정용기가 신광면(神光面) 우각리(牛角里)에서 아버지 정환직이 붙잡혔다는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편지에 속아 경주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정용기가 대구의 경상감영에 수감된 뒤 영천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용기의 사촌 정사홍(鄭士弘)이 거느린 의병 30여 명만 남아 있는 산남 의병부대에 들어가 부대의 전열을 정비하였다. 그 해 4월 12일 이운경(李雲景)·정천여(鄭千汝)·남석문(南錫文) 등과 함께 출전하였다. 무기는 화승총 25자루를 휴대하였을 뿐이었다. 1906년 4월 13일 경주 하옥동(下玉洞)을 거쳐, 영덕 청련사(靑蓮寺)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산남 의병부대의 중군(中軍)이었던 이한구(李韓久)의 지휘를 받아 부서를 개편하였는데, 우익장(右翼將)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 26일 의병 80여 명을 이끌고 경주로 향해 진군하였다. 이날 정오에 영덕 적암(赤巖)에 도착하자 경주진위대 병정 30명이 총을 쏘며 습격하였다. 이에 영덕(盈德) 옥동(玉洞)으로 돌아와 수습된 의병을 해산하고 향리 청송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각처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이 찾아와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으므로 청송을 떠나 영천의 김성찬(金聖贊)의 집에 두 달여를 머물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정환직의 주선으로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5월 산남 의병부대를 다시 일으켰다.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 의병부대는 서울 진공을 목표로 의병 부대를 재편성하고, 우선 관동(關東)으로 진출하기 위해 신돌석부대(申乭石部隊)를 지원하며, 동해안으로 척후병을 파견하는 등 북상의 길을 찾고 있었다. 이때 정사홍이 청송으로 찾아와 다시 의병부대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1907년 5월 정사홍의 권고로 의병 30명을 모집하여 영천군 자양면(紫陽面) 보현리(普賢里)의 거동사(巨洞寺)로 갔다. 여기에서 의병장 정용기를 청해 함께 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뜻이 맞지 않아 결별하였다. 이후 정사홍과 함께 청송·흥해 등지를 전전하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동년 6월 정사홍과도 뜻이 맞지 않아 다시 그와 결별하고 포군 20명을 거느리고 청송 보현산(普賢山)으로 들어가 유진하였다. 그리고 포군을 모집하기 위해 영일군 죽장면 입암(立巖)으로 들어가던 중, 1907년 6월 19일 순검을 만나 고향으로 피신하였는데, 6월 20일 청송에서 순검에게 붙잡혔다. 1907년 9월 4일 경상북도재판소에서 종신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그 해 9월 15일 무기 은닉처를 추궁당하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