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본관은 김해이다. 울산병참(蔚山兵參)의 중위가 되었다가 군대해산에 이르러 분함의 눈물을 흘리면서 맹세하기를 “임금의 녹봉을 먹고 어찌 구차하게 살아간단 말인가?”하고 병장기 약간을 들고 산남의진에 귀속하여 연습장이 되어 매번 성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대함에 반드시 선두에 올랐다. 입암의 전투에서 패한 뒤 이세기, 우재룡과 함께 같은 마음으로 죽을힘을 다해 동엄공을 도왔고, 동엄공이 붙잡혀 해를 당한 뒤에는 최세한이 이끄는 산남의진의 선봉이 되어 자못 이름이 있더니만 최세한이 또 붙잡히고 자신 또한 붙잡혔지만 결코 굽히지 않다가 대구 감옥에서 죽었다. 한유복과 김학, 이 두 사람은 평소 의병(義兵)이었는데 적에게 항복하여 적의 헌병보조관이 되어 의병들을 죽인 것이 그 수효를 알지 못할 정도이다. 김성일이 형편이 다하고 힘이 다해 동지들을 찾아다니면서 혼자 길을 가다가 길에서 한유복을 만났는데 한유복이 “형은 어딜 가오?”라고 하기에 김성일이 “일이 궁하고 급박함에 달려 있어 어디로 갈지 모르겠네.”라고 하면서 안부 말을 주고받는 사이 한유복이 번개같이 김성일을 포박하고 인비동(仁庇洞)1) 사람으로 하여금 밤새도록 김성일을 지키게 하였는데, 마침 그곳을 김학이 지나가기에 김성일이 밧줄에 묶인 부위가 고통스러움을 참지 못해 김학에게 일러 “자네는 나를 위해 조금만 묶은 밧줄을 느슨하게 풀어주어 잠시나마 아픔을 줄여 주는 것도 지난 날 친구였던 사람의 인정일 걸세.”라고 했더니 김학이 “지난날은 친구였지만 지금은 친구가 아니니 그대의 청을 들어주지 못하겠소.”라고 했다는데, 이 말이 지금껏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원문〉 金聖一은 金海人이라 爲蔚山兵參中尉하야 至大韓軍府解散하야 憤涕誓曰食君之祿하고 豈可以苟存耶아 取兵器若干하야 歸屬于本陣하야 爲鍊習將하야 每入城對敵에 必先登之하다 立巖敗後에 與李世紀禹在龍으로 同心死力하야 佐東广公하고 後爲崔世翰先鋒하야 頗有名稱이런이 世翰이 又被執에 身亦被執하야 不屈而死於大邱獄하다 韓遺腹金鶴此二人은 素是義兵也라 降於敵하야 爲敵之憲兵輔助官하야 殺義兵不知其數라 金聖一이 勢窮力盡하야 訪同志而獨行하다가 中道에 遇遺腹하야 遺腹이 曰兄은 何之오 聖一曰事在窮迫하니 不知所向이다 寒溫酬酌之間에 遺腹이 如急雷縛聖一하야 使仁庇洞人으로 經夜守之하니 金鶴이 過之어늘 聖一이 不耐痛楚하야 謂金鶴曰汝爲我小緩하야 暫時減痛도 亦故人之情也라 金鶴이 曰昔爲故人이요 今非故人이라 하고 不聽하니 此言이 傳之于世矣러라 <山南倡義誌 卷下 40p>金聖一 義士 略歷(김성일 의사 약력)金聖一(김성일)은 金海(김해)사람이라 蔚山(울산) 兵參中尉(병참중위)로서 山南義陣(산남의진)에 入陣(입진)하여 적극 활약하다가 종말에 세궁력진되어 피금되었다. 韓遺復(한유복)과 金鶴(김학)은 본래 義兵(의병)에 있다가 倭(왜)헌병보조원이 되었다. 公(공)은 그 두 놈의 손에 잡히어 그날 밤에 仁庇洞民(인비동민)이 監視(감시)하고 경야하는데 公(공)은 捕繩(포승)을 좀 늦추어 주기를 두 놈에게 애걸하니 두 놈이 불청하였다. 공은 死刑(사형)되고 그 후에 韓金(한김) 두 놈도 權不十年(권불십년)으로 人間賤待(인간천대)로 돌아와서 路邊(노변)에서 餓死(아사)하였다. <山南義陣遺史45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