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랜 동안 침묵해왔다. 조선의 길고 긴 500년 동안 글과 권력을 가진 몇몇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당한 한일합방, 그건 일종의 국가적 강간이었다. 그리고 35년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상징적인 말이 아닌 성대가 만드는 한국어의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것은 침묵을 넘어선 마비의 강요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해방. 그때 해본 소리라고는 단 여섯 자였다“대한독립만세!”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말을 배우지 못한 아버지 세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말에 익숙했던 몇몇이 다시 정권을 잡고 말았다. 그들은 조선시대 내내 이어온 유교의 언어에도 익숙했고, 분석과 장사에 잘 맞는 일본어에도 익숙했다. ‘김치’ ‘된장’ ‘설렁탕’ 밖에 못하는 아버지 세대는 ‘국제’ ‘경제 협력’ ‘증권’ ‘무역’ 어쩌구 하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멍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망나니 춤들을 멀거니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6.25, 비명 소리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 이때는 아무런 말이 필요 없던 시대였다. 배고픈 우리들에게는 한소절의 노래들이 배급되었다.“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우리는 노래하고 일하고, 일하고 노래했다. 말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몇 마디 말을 빨리 배운 사람들은 ‘우연한 사고사’를 당했다. 그리고 닥친 1980년대, 그것은 참으로 길고 긴 침묵의 기간이었다. 그 침묵은 그들이 해석하듯이 ‘안정’ 을 희구해서가 아니라 겁이 나서였다.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열린 1990년대, 말을 해도 된다는 윤허가 떨어졌다. 조선시대 500년을 합하면, 근 590년 만의 윤허였다.“성은이 망극하여이다.”하지만 우리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민주주의는 떠들면 된다니까 마구 떠들어보았다. 자본주의는 돈 먹고 돈 먹기니까 은행돈 끌어다 벌고, 갚아가면 된다고 떠들어됐다. 자기자본 몇천 퍼센트의 이자 돈을 끌어다 너도 먹고 나도 먹고 같이 먹었다. 어차피 국민들이야 말을 못하는 부류 아닌가?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김치’ ‘된장’ ‘설렁탕’이 전부 아닌가?언론? 기자의 말인지 청와대 대변인의 말인지 구별할 수 없던(현재형으로 써도 되나요?) 글과 말. 그것만으로 판단의 근거를 삼기에는 너무 위험한 삶의 투자 아닐까? 청와대 대변인이 우리들의 행로를 명확하게 인도해줄 수 있을까? 그들은 정말 과거를 명확히 이해하고, 현재를 정확히 분석하며, 미래를 명쾌하게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일까? 중고등학교 내내 교과서와 참고서 외에는 본 일이 없고, 대학 내내 미팅과 영어책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기자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혜안이 생길까? 통찰력이 생길까? 설사 생졌다면 용기는 있을까? 매일 끼리끼리 모여서 잡담이나 나누다가 같은 장소에 우우 몰려가서 대충 사진 찍고, 사우나 갔다가 늦게 와서 남의 취재 노트 베껴다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사람들에게서 용기를 기대하는 일은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닐까? ‘모 인사의’ ‘묘한 기류’ 따위로 ‘진실’을 보도하는 글들을 계속 돈 내고 보아야 할까? 우리 사회가 말을 잃어버린 데에는 그래서 언론의 책임이 크다.오랜 ‘언어 침묵’ 은 어법을 상실하게 만든다. 말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외마디 소리밖에 지르지 못한다. 외마디 소리와 외마디 소리가 부딪치는 현상이 바로 싸움이다. 유달리 싸움이 많은 한국사회. 동대문을 가도 남대문을 가도 싸움이 흔한 사회. 그건 우리가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목소리 큰놈이 이긴다.”는 이제 자조의 표현을 넘어 격언이 되고 말았다./심보통 2024.4.16※ 위 글은 상명대 김경일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310~312쪽의 것이다. 시차가 느껴지는지 몸소 느껴 보시란 뜻에서 출처를 맨 아래 둔다. 26년 전에 쓰인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