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는 하늘과 동업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일기가 중요하다. 절기와 때를 놓치면 농사는 낭패를 당한다. 연이은 비로 질땅이 되어버린 탓에, 오늘 여덟 명의 ‘농촌 살아보기’ 식구들의 영농체험 일정은 며칠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장맛비에 불을 못 붙였을 화승총을 든 의병들의 모습을 회상해본다. 원망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재빠른 대처만이 운영자인 내가 할일이다.
남승하자는 우성, 본관은 영양으로 성재의 후예이다. 왜놈들이 현해탄을 건너온 뒤로 일본인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의병들을 모집하여 관동으로 들어가려다가 일이 끝내 자신에게 이롭지 못하여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 그 후 산남의진의 거사를 듣고 일가인 남석우, 남석인 등과 함께 산남의진으로 들어가 종군하다가 관동으로 들어가던 날에는 향도(向導)로서 자원하였다. 고향마을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적과 싸움 끝에 패하여 서기 1907년 (음력)4월 9일 청송의 화목에서 순사(殉死)하였다.〈원문〉 南昇夏는 字禹聖이요 英陽人이라 誠齋后라 自倭奴渡海之後로 有不共戴天之志하야 募衆入關東이라가 事竟不利하고 歸鄕里하야 聞山南之大擧하고 與族人錫佑錫仁等으로 共往從之하야 入關東之日에 以向導로 自願하고 求募於鄕里라가 爲敵之所敗하야 丁未四月九日에 殉死於靑松和睦하다<山南倡義誌 卷下41p>南昇夏 義士 略歷(남승하 의사 약력)南昇夏(남승하)는 字(자)는 禹聖(우성)이요 貫鄕(관향)은 英陽(영양)이라. 왜적들이 入國(입국)하는 것을 보고 분격하여 동지를 모집하여 강원도지방에서 義兵(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가 山南義陣(산남의진)이 일어남을 듣고 山南義陣(산남의진)에 들어와서 약속을 정하고 山南義陣(산남의진)을 위하여 청송등지에서 군수물품을 수집하다가 丁未 四月(정미 사월)에 和睦(화목)서 殉節(순절)하다. <山南義陣遺史459p>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거성리(巨城里)에서 아버지 남재희(南載熙)와 어머니 여강이씨(驪江李氏)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187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영양(英陽)이며, 자는 우성(禹聖)이다. 이명으로 남정하(南廷夏)를 쓰기도 하였다. 1896년 3월 12일 의병을 일으킨 청송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족친 남석구(南錫球)·남석술(南錫述)·남석인(南錫仁)·남석우(南錫佑) 등과 함께 감은리전투(感隱里戰鬪)에 참여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일본의 국권침략에 분개하여 관동지방(關東地方)에서 동지를 모집하는 등 창의(倡義)를 준비하기도 했다. 이후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명을 받고 산남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이에 청송군 현동면 일대에 살고 있던 영양남씨(英陽南氏) 일족인 남석구·남석인 등과 함께 산남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향도(向導)를 맡아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4월 영해(寧海)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돌석 의병부대가 안동(安東)에서 파견된 관군에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산남 의병부대의 정용기와 함께 신돌석 의병부대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영해로 진군하였다. 4월 28일 신광면(神光面) 우각리(牛角里)에서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의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간계에 속아 대장 정용기가 붙잡히자, 의병 활동을 중단하고 청송으로 귀향하였다. 1907년 4월, 산남 의병부대 대장 정용기가 다시 진용을 편성하고 재기하였다. 이에 청송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1907년 4월 9일 청송군 현서면(縣西面) 화목(和睦)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