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두 번째 신문사를 그만둘 때 나는 ‘이제 스스로 설 수 있겠다’는 확신과 의무감을 가졌다. 그리고 ‘과학도시’ 대전에 산다는 이유로, 내 두 아들 미래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요량으로 과학에 다걸기 할까, 신실한 불자(佛子)인 내 어머니를 생각하며 보듬으며 불교에 다걸기 할까를 숙고하다 과학도, 불교도 도무지 내 작가 인생 후반부를 다걸기엔 확 당기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걸 체험했다. 내가 확 당기는 쪽은 이전부터 해오던 ‘정신사’ 쪽이었다. ‘우리 원초(원류) 정신’이었던 거다.‘원초 정신’을 좇는 길은 단순해 보였지만 깜깜한 원시림에 들어선 것처럼 두렵고도 막연한 느낌을 갖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이리 어영부영하다 인생 종치겠다’는 위기감의 근원은 민족주의에 기반하거나 유불선 근본주의에 기반한 아전인수 격 견강부회 식 상고사(上古史) 쓰기에 있었다. 나는 그런 식의 감성과 애국팔이에 기댄 우리 고토(古土)의 장대함과 민족의 강인함의 ‘강조 문법’에 혹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있다. 뭘 알기에 되레 근심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단순하게 어설피 알면 고민이란 게 없고 고민이 없으니 다른 생각을 않게 된다. 원초 정신을 좇겠다는 ‘가상한 생각’은 갑골문의 존재를 알면서 매우 곤란해졌다. 아니 아주 허무맹랑해졌다. 갑골문의 존재란 우리가 최고(最古) 혹은 정통 동아시아 문자라 생각한 한자(漢字)의 존재와 그 존재로부터 배우고 쌓은 많은 지식(특히 유교)이 허튼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말과 글의 70%를 차지하는 한자와 한문이 오리지널 한자인 갑골문과 비교해 보면 아주 황당한 말과 글이 된다. 지식쌓기의 허망함이 아닐 수 없다. 말인즉슨 말과 글은 그 시대의 일상사를 반영한 것일진대 갑골문 시대와 한자 시대의 일상사가 연속성이 없다는 뜻이다. 원류(갑골문)를 기본으로 할 때 우리가 익히고 배워온 한자 시대의 것들은 순 가짜라는 말이 된다. 때문에 뒤틀리고 왜곡된 채 세워지고 써진 역사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싶다. 한자의 원류인 갑골문과는 별개로 써진 <삼국사기>가 대체 뭔 소용이고, <삼국유사>가 대체 뭔 소용인가 싶은 것이다. 갑골문의 뜻과 한자의 뜻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각기 사용됐다면, 그 후대에 써진 역사서는 말짱 허무맹랭하게 써진 것들 아닌가 말이다. 그런 중에 ‘아, 인간사 다 그런 것이겠구나’ 싶은 장면 하나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조우성이란 변호사가 인공지능(AI)를 이용해 법률문제를 신속하게 운영하는 강의를 시작했다는 글을 봤다. 그 글에는 방대한 법전과 다양한 판례를 일목요연하게 서치해서 정리하는 일을 AI가 금방 해결해주어 일의 능률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 변호사의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잠시 생각했다. 두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하나는 문학박사인 누님이 최근 내게 AI를 추천한 일과 20여년 전 언론고시를 준비할 때 언론고시 카페에서 국어 법칙을 아주 깊고 정교하게 정리해서 업로드하던 초당대 A교수의 모습이었다.초당대 A교수는 국어 기본도 모르는 자들이 기자가 되면 안 된다는 교조적 언설을 곧잘 펴곤 했다. 그가 그 언설을 왜 자기 학교 학생들이 아닌 언론고시 카페에 와서 그렇게 열광적으로 펴댔는지는 여적 잘 모르겠다. 아무튼 A교수는 ‘국어 1일타 강사’로 그 시절 언론고시 카페에서는 명성을 드날렸다. 그런 그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일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의문이 든다. 지금 생각하면 남의 말 영어 공부할 시간에 우리말 국어나 제대로 공부하라는 교시는 그야말로 ‘꼰대’적 가르침일 뿐이다. 이것이 진리인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걸음마도 떼기 전부터 영어학원을 다니는 아이가 수두룩한 이 시대에 비춰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영어도 국어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했어야 했다. 아니 그가 그리도 국어를 사랑했다면 국어는 물론 영어, 중국어 등 섭렵할 수 있는 남의 언어를 일찍이 공부하라 했어야 했다. 도도한 시대 흐름이 그걸 말해주고 있고 실제 현상(現狀)이 그게 옳다고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이제 거리의 영어간판을 보고 혀를 찾는 꼰대‘조차’ 없다. 일상적으로 영어를 쉘라쉘라 한다고 타박하는 꼰대도 없다. 되레 영어를 못하면 부끄러워하고 국어를 못하면 별 반응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긴 영어를 잘하고, 국어를 못하면 어떤가. 시대가 영어를 원하고 영어를 잘하는 자를 우대하면 그게 정답 아닌가. 아직도 전 세계를 통틀어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보다 한자를 사용하는 인구가 더 많다고 하지만 초강국 미국의 힘과 그 영향력에 눌려 만년 2위인 중국의 중국어와 동아시아의 한자는 그런 걸 피부로 와닿게 하지는 못한다. 한편 나는 문학박사요, 대학에서 아이들에게 글쓰기와 말하기를 20년 넘게 가르치며, 한 회사에 소속되어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 개발팀의 일원인 누님이 추천한 AI를 처음에는 무시했다. 누님은 아이들 글쓰기 과제에 도움이 되고, 내가 글쓸 때도 큰 줄기를 잡아주기 때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 누님에게 나는 ‘줄기 잡는 것도 알아서 해야지 그걸 AI에게 의지하면 그게 순수 창작물이나 과제라고 할 수 있나’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 일이 있고 두어 달 뒤에 조우성 변호사의 글을 봤고 이번에는 생각이 전혀 달라졌다. ‘하긴 방대한 법전에서 법조문을 찾고, 글로벌 판례와 국내 판례를 하나하나 손으로 찾을 바에야 AI 도움을 받으면 일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도우미로서 AI와 도구를 사용한 인간 호모 파덴스(Homo Fadens)의 만남 잘 만나면 환상의 짝꿍이겠다. 나는 그런 맥락으로 갑골문과 한자의 단절성도 쉽게 이해했다. 인생살이 정답이 어디 있나. 내가 만들고 시민이 만들고 국가가 만들고 세계가 만드는 게 정답이지. 다만 ‘역사의 함정’에 빠지면 곤란하다. 역사라는 고정관념 속에는 왠지 그럴싸한 연속성이 있어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연속성을 넘어 완전 다른 이야기가 된다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인식된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리 배웠다. 그야말로 관념이다. 이 관념의 실체는 현실을 보면 안다. 오리지널 이야기(갑골문으로 써진 역사)와 그 이후의 이야기(한자로 써진 역사)가 전혀 다른 이야기고, 그 다른 이야기가 누대로 상식으로 내려왔다. 그러다 어느 날 오리지널 이야기(1899년 은대 갑골문 다량 발견)가 발견됐다. ‘아, 오리지널 이야기 발견됐으니 이제 그걸 공부하자, 바루자’ 이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역사’를 뒤집으면 ‘당대’다. 당대를 뒤집으면 역사다. 당대는 역사처럼 대단할 일이 없는 단순 일상사다. 우리가 지금 온갖 사회 현상을 목도하면서도 무덤덤하게 살아가듯이 당대는 그냥 당대다. 그걸 신화화하고 위대한 것으로 조각하고 조작한 건 당대가 볼 때 후대고 후대가 볼 때 그것이 역사다. 그런 면에서 역사는 순전히 해설학이요, 해석학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으면 되는 게 역사다. 우리는 이제껏 꿈 같은 역사를 배우고 간직하며 살아왔다. 인류의 흥망성쇠는 그저 당대의 일상사일 뿐인데도 말이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자. 그럼 뭣이 중헌디 하는 문제가 솟구친다. 뭣이 중하긴 ‘지금, 여기’가 중허지. 현재를 잘 살자. 그게 역사고, 그게 삶이다. 삶을 잘 가꾸믄데 필요하다면 AI의 도움을 받자, 그러다 필요 없어지면 AI도 내팽개치자. AI를 맹신하면 이미 지나가 버린 갑골문 시대를 부여잡고 원류(源流) 어쩌고저쩌고하는 꼰대가 된다. 늙은 꼰대 말고 젊은 학생으로 살자. 단 젊은 학생은 능력자라는 점을 꼭 기억하자./심보통 2024.4.25.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5-05-01 19:55:32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동정
이 사람
데스크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상호: 경북동부신문 /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최무선로 280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64 / 등록일 : 2003-06-10
발행인: 김형산 / 편집인: 양보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보운 / 편집국장: 최병식 / 논설주간 조충래
mail: d3388100@hanmail.net / Tel: 054-338-8100 / Fax : 054-338-8130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