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거리의 영어간판을 보고 혀를 차는 꼰대‘조차’ 없다. 일상적으로 영어를 쉘라쉘라 한다고 타박하는 꼰대도 없다. 되레 영어를 못하면 부끄러워하고 국어를 못하면 별 반응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긴 영어를 잘하고 국어를 못하면 어떤가. 시대가 영어를 원하고 영어를 잘하는 자를 우대하면 그게 정답 아닌가. 아직도 전 세계를 통틀어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보다 한자를 사용하는 인구가 더 많다. 하지만 초강국 미국의 힘과 그 영향력에 눌려 만년 2위인 중국의 중국어와 동아시아의 한자는 그런 걸 피부로 와닿게 하지는 못한다.한편 나는 문학박사인 누님이 추천한 AI를 처음에는 무시했다. 누님은 대학에서 아이들에게 글쓰기와 말하기를 20년 넘게 가르치며, 한 회사의 일원으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누님은 AI가 아이들 글쓰기 과제에 도움이 되고, 내가 글쓸 때도 큰 줄기를 잡아주기 때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 누님에게 나는 ‘줄기 잡는 것도 알아서 해야지 그걸 AI에게 의지하면 그게 순수 창작물이나 과제라고 할 수 있나’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 일이 있고 두어 달 뒤에 조우성 변호사의 글을 봤고 이번에는 생각이 전혀 달라졌다.‘하긴 방대한 법전에서 법조문을 찾고, 글로벌 판례와 국내 판례를 하나하나 손으로 찾을 바에야 AI 도움을 받으면 일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도우미로서 AI와 도구를 사용한 인간 호모 파덴스(Homo Fadens)의 만남, 잘 만나면 환상의 짝꿍이겠다. 나는 그런 맥락으로 갑골문과 한자의 단절성도 쉽게 이해했다. 인생살이 정답이 어디 있나. 내가 만들고 시민이 만들고 국가가 만들고 세계가 만드는 게 정답이지. 다만 ‘역사의 함정’에 빠지면 곤란하다. 역사라는 고정관념 속에는 왠지 그럴싸한 연속성이 있어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연속성을 넘어 완전 다른 이야기가 된다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인식된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리 배웠다. 그야말로 관념이다. 이 관념의 실체는 현실을 보면 안다. 오리지널 이야기(갑골문으로 써진 역사)와 그 이후의 이야기(한자로 써진 역사)가 전혀 다른 이야기고, 그 다른 이야기가 누대로 상식으로 내려왔다. 그러다 어느 날 오리지널 이야기(1899년 은대 갑골문 다량 발견)가 발견됐다. ‘아, 오리지널 이야기 발견됐으니 이제 그걸 공부하자, 바루자’ 이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역사’를 뒤집으면 ‘당대’다. 당대를 뒤집으면 역사다. 당대는 역사처럼 대단할 일이 없는 단순 일상사다. 우리가 지금 온갖 사회 현상을 목도하면서도 무덤덤하게 살아가듯이 당대는 그냥 당대다. 그걸 신화화하고 위대한 것으로 조각하고 조작한 건 당대가 볼 때 후대고 후대가 볼 때 그것이 역사다. 그런 면에서 역사는 순전히 해설학이요, 해석학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으면 되는 게 역사다.우리는 이제껏 꿈 같은 역사를 배우고 간직하며 살아왔다. 인류의 흥망성쇠는 그저 당대의 일상사일 뿐인데도 말이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자. 그럼 뭣이 중헌디 하는 문제가 솟구친다. 뭣이 중하긴 ‘지금, 여기’가 중허지. 현재를 잘 살자. 그게 역사고 그게 삶이다. 삶을 잘 가꾸는데 필요하다면 AI의 도움을 받자. 그러다 필요 없어지면 AI도 내팽개치자. AI를 맹신하면 이미 지나가 버린 갑골문 시대를 부여잡고 원류(源流) 어쩌고저쩌고하는 꼰대가 된다. 늙은 꼰대 말고 젊은 학생으로 살자. 단 젊은 학생은 능력자라는 점을 꼭 기억하자./심보통 2024.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