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 마을에 가면 김인후 선생이 태어나서 자란 생가 백화정이 있다. 김인후는 여덟 살에 조광조의 숙부인 조원기가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신동이라 할 정도로 뛰어났고 열 살 때 후임 관찰사로 부임한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으나 그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귀향을 가자 18세까지 독학으로 사서오경을 공부했다. 중종 26년(1531)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 이황 등과 교류하면서 퇴계와는 아주 돈독한 사이였다. 중종 35년(1540) 31세에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가 이황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사상적 토론으로 성리학 이론을 확립한 것이 조선성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중종 38년(1543)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 되어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와 사제관계가 되니 세자는 그의 학문과 도덕에 깊이 감동받아 주자대전 한 질을 기증하기도 했다. 1543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여 기묘사림들의 신원을 호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향리로 내려갈 것을 청하였으나 만류되고 12월 옥과현감을 제수 받아 고향근처로 돌아온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마자 8개월 만에 또 다시 죽자 하서는 일체의 벼슬을 버리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초당을 세우고 주자학 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했으며 송강 정철도 그의 문하생이었다. 인종이 승하한 매년 7월 1일은 마을 앞 난산(卵山)에 올라 하루 종일 통곡을 하였고 그곳에는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통곡단과 그 사실을 새겨놓은 난산비가 세워져있다.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약, 율력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통달하였으며 명종 15년(1560) 5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서는 정조 20년(1796)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해동 18현 중 호남인으로써는 유일하고 사 후 영의정에 추증하면서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위패를 모신 장성 필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없어지지 않고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서원이다.이곳의 풍수입지는 문수산에서 부터 뻗어 내린 산들이 하나같이 순하고 아름다운 귀인봉으로 하서 종택은 동그란 금형산 밑에 자리하고 있다. 풍수고서 『인자수지』에서는 “산관인정(山管人丁)수관재물(水管財物)”이라 하여 산은 사람을 관리하고 물은 재물을 관장한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마을에서 훌륭한 인재가 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서 종택은 선생의 5대 조모인 여흥민씨 할머니가 정해준 자리라 한다. 민씨 할머니는 조선 4대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4촌으로 풍수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고 그녀의 풍수이론을 정립한「하소결(荷沼訣)」은 울산김씨의 문화유산으로 전해오고 있다. 마을 뒷산에서 좌우로 뻗어 내린 용호자락은 마을을 잘 감싸주고 있고 외 백호자락은 마을 앞 들판까지 감싸며 안산을 만들었다. 이 마을은 양택3요결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전저후고[前低後高]와 더불어 청룡 끝자락에 있는 필암 바위가 마을의 수구를 막아 안쪽의 생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니 전착후관[前窄後寬]의 조건까지 모두 갖춘 양택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