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은 ‘의병의 날’이다. ‘의병의 날’은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주관으로 의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행사를 개최하는 대한민국의 기념일로, 2010년 5월에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2011년부터 기념하고 있으며, 2022년 ‘제12회 의병의 날’ 기념식이 영천에서 열린 바 있다. 그러나 먹고살기에 바쁜 이 시절에 ‘의병의 날’을 기억하는 이 몇이나 될까. 지속적으로 관련 행사를 열어 홍보하고 주지시키지 않으면 그냥 달력 위의 기념일로 지나갈 뿐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은 ‘의병의 날’, ‘현충일’, ‘6.10민주항쟁기념일’, ‘6.25전쟁일’, 그리고 2002년 ‘6.29연평해전’ 등 호국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 많은 달이다. 그 역사적 의미를 상기하고 잊지 말아야 할 터이다.曺相煥 義士 略歷(조상환 의사 약력) ②公(공)이 불행하게도 靑松(청송)지방에서 被擒(피금)되매 왜적들은 公(공)을 인치하고 靑松(청송), 安東(안동), 義城(의성), 軍威(군위) 등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항복하라고 만단권유를 다 하였으나 公(공)은 종시 듣지 않고 軍威 孝令(군위 효령)에 와서 대변본다 속이고 간수하는 왜병을 발길로 차서 죽이고 달아나다가 왜병들의 총살에 孝令(효령)장터 뒷산에서 순절하니 때는 戊申三月二十三日(무신삼월이십삼일)일러라. 公(공)의 未亡人(미망인) 林氏(임씨)는 公(공)이 靑松(청송)서 被擒(피금)되었단 소문을 듣고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수소문하다가 軍威(군위)에서 순절하였단 확보를 듣고 달려가서 掩土(엄토)를 파고 屍體(시체)를 보니 裸體(나체)로 되어있고 또 부량패 몇 놈들이 와서 말하기를 시체를 수호할 때에 연료대금과 매장할 때에 술값을 내라하고 독촉하는지라. 林氏(임씨)는 그놈들을 꾸짖는다. 우리 亡夫(망부)는 우리 大韓(대한)을 구하고자 하다가 죽은 의사이다. 大韓(대한) 사람이 그 義士(의사)의 주검 옷을 벗기고 또 掩土(엄토)한 비용을 받고자하니 이 사람들이 도리어 왜놈들보다 더 하다 하고 방성통곡하니 그 소리가 처창하여 성 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마을 老人(노인)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두 나와서 林氏(임씨)를 위로하고 옷을 찾아주고 사과를 극진히 하고 洞內(동내) 靑壯年(청장년)들을 총동원시켜서 시체를 본집까지 운반하다. <山南義陣遺史430~432p>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06년 경북 영천에서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거의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자 입진하여 초장(哨將)·도포장(都砲將) 등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에 거의한 산남의진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체포되었던 정용기가 풀려나온 뒤였다. 진용을 재정비한 정용기의병부대는 1907년 4월에 400여 명의 규모로 청송(靑松)과 청하(淸河), 영천 일대의 일본군을 습격하면서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조상환은 정용기 의병부대의 초장과 도포장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보현산(普賢山) 일대의 포수를 비롯하여 뜻있는 사람들을 의진에 참가시키는 한편 군수물자를 수집하는데 앞장섰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 정용기의병장이 일본군과 교전 끝에 순국하자,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아들의 의병부대를 수습하여 재차 거의하였고 조상환도 이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을 재개하였다. 같은 해 10월과 11월에 이들 부대는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을 벌여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12월 7일 영덕전투에서는 일본군 2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청하 지역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정환직 의병장이 체포되자, 조상환은 이세기(李世紀) 등과 함께 군사를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이끌면서 청송(靑松)·안동(安東)·의성(義城)·군위(軍威) 등을 무대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청송 지역에서 붙잡혔다. 이때 일본군은 조상환에게 전향할 것을 권유하고 조상환을 앞세워 여러 고을의 의병들을 회유하고자 했으나 조상환은 이를 끝내 거부하였다. 오히려 그는 1908년 2월 23일 감시하는 일본군을 죽이고 탈출하다가 일본군의 총격을 받아 효령(孝令) 장터 뒷산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