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농촌살아보기 참가자들과 산남의진 관련 유적지 중 이세기장군 묘소를 참배할 예정이다. 이 지역을 방문한다면 이 지역의 역사문화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훌륭한 분들을 섬김은 그 지역민의 당연한 일이다. 산남의진은 자양면민, 더 나아가서 영천인의 자긍심이다.남석술자는 경숙이고, 본관은 영양이며, 서기 1872년 임신에 태어났다. 과감한 기질이 있고 위험함을 피하지 않아 적들과의 싸움에는 반드시 선두에 나아갔다. 서기 1907년 (음력)11월 1일 영덕 유암(酉巖)에서 묵던 산남의진을 적들이 새벽에 침입하여 교전하던 중 경숙이 먼저 나가 전사하였다.〈원문〉南錫述은 字敬叔이요 英陽人이요 壬申生이라 有果敢之氣하고 不避危險하야 與敵交鋒에 必進先頭러니 丁未十一月初一日에 大陣이 到盈德하야 留宿於西巖이라가 敵이 晨夜侵入이라 交戰之中에 敬叔이 先進戰死하다<山南倡義誌 卷下42p>南錫述 義士 略歷(남석술 의사 약력)南錫述(남석술)은 字(자)는 경숙(敬叔)이요 貫鄕(관향)은 英陽(영양)이라. 山南義陣(산남의진)에 入陣(입진)하여 활약하더니 盈德 酉巖(영덕 유암)에서 순절하다. <山南義陣遺史460p>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도평동(道平洞)에서 남문철(南文喆)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자는 경숙(敬叔)이며, 이명은 남경규(南景圭)이다. 성장하면서 기골이 장대할 뿐 아니라 힘 또한 장사라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국모의 원수를 갚고 왜적을 몰아내고자 하는 각오로 심성지(沈誠之)의 청송 의병부대에 들어가 감은리(甘隱里) 전투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고종(高宗)의 의병 해산 조칙(詔勅)으로 의진이 해산되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정용기(鄭鏞基)가 일으킨 영천(永川)의 산남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의병과 군자금을 모집한 뒤 청송(靑松)·청하(淸河)·흥해(興海)·영덕(盈德) 등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1907년 2월 24일, 동해안 영덕지방에서 여러 차례 적과 교전하였으나 적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리다가 결국 영덕 유암(酉岩)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총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