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만에 [글밥]을 짓는다. 3일 라온이 바론이와 강원도 여행을 다녀온 후 여독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평소에도 운전을 좋아하지 않는데, 하물며 장거리 운행이었음이야. 그 때문인지 산해진미를 먹고 다녔는데도 몸은 여름 햇살에 폭삭 시든 상추마냥 시들시들했다. 헌데 시원찮은 몸과 시들시들한 상추,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물을 담뿍 주면 생기를 띤다. 생기가 없을 땐 억지로 정신을 앞세워 몸을 차리려 들기보다 정신을 몸에 맡기는 게 뒷날을 보아 낫다. 마흔 중반 이후의 삶은 밤사이 안녕이어도 슬픔의 경중만이 남을 뿐, 가는 건 가는 거다. 모두 직간접의 경험칙이다. 오늘 아침에야 저절로 아침 일찍 몸이 일어났다. (몸이 절로 일어나자) 돌연 어느 수행자와 고승 간 우문현답이 떠올랐다. “스님 도(道)가 무엇입니까?” “너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불교, 도교, 유교에서 고명한 도란 목숨 부지한 자들의 깨작거림에 불과한 것, 헛지랄 떨지 말라 나는 그리 읽었다. 그래 숨을 부지해야지, 아니지 건강하게 숨을 쉬어야지 밭을 매든 술을 뜨든 할 것이 아닌가.어제는 한 달에 한 번 두 아들이 청정 의식을 치르는 날, 이발하는 날이었다. 한 2년 전까지 우리 네 가족은 이 미장원에서 이발을 하고 파마를 했다. 그러다 내가 먼저 이 미용실에서 이탈했다. 미용 디자너이가 개인사로 3~4명 바뀔 때까지는 그럭저럭 돈값을 셈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는 사이 이발료가 과하다 싶을 만큼 껑충껑충 뛰었다. 가격과 가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틈틈이 동네 미장원을 주유했다. 반값하는 미장원이 더러 보였다. 저 보살은 무슨 사연으로 저리 공덕을 쌓는 건가, 신기했다. 궁금도 하여 찾았다. 이미 당한 머리를 보며 정반대의 가격과 가치를 떠올렸다. 보살의 공덕이 아니라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실력으로 밥벌이 중이었다. 묘한 것은 그런 반값집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두 번의 실패 끝에 그만하면 가격과 가치가 보합인 곳을 찾았다. 고객의 9할은 할머니들이다. 예약도 없고 인연 닿는 대로 깎으면 된다. 허름하지만 요란하지 않아서, 의자는 염색약으로 염색돼 있지만 그런대로 그런 풍취가 잘 어울려서, 무엇보다도 어머니뻘 아주머니가 갈 때마다 ‘총각’이라고 해주어서 배실배실 잘 다니고 있다. 올 초 이 가게도 1,000원이 올랐다. 아주머니 왈 “물가가 워낙 높아야 말이지요.” 총각 손님 놓칠까 눈치를 좀 보는 투였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걱정 마시라고 왈, “아이고, 별 말씀을요. 동네 할머니들한테 복 쌓으시는 겁니다.” 뒤돌아 나오면서 나는 또 한 번 가격과 가치를 생각했다. 물가가 이 정도만 돼도 서민 주름살이 좀 펴질 텐데.라온이 바론이 그리고 집사람 단골미용실은 시내 중심가에 있다. 라온이 바론이 이발료나 내 이발료나 같다. 10분 기술료 치고 비싸다고 느끼는 건 순전히 내 판단이니 차치하자. 이런 대형 미용실도 두 가지 한계를 명백하게 보인다. 첫째는 더 화려하게 치장할 상상력의 한계다. 한때 미용실은 고급티를 낼수록 내부 단장을 경쟁적으로 벌였었다. 이제 그런 치장은 정점에 달했다. 거의 변화가 없다. 미용비만 치솟고 있다. 마치 한때 고급을 자처하는 신문들이 경쟁적으로 본지와 섹션의 지면을 대책없이 늘려가다 빚만 잔뜩 지고 하루아침에 없애버린 경우와 비슷한 풍경이다. 둘째는 읽을거리의 한계다. 미용실이 고객들을 위해 마련해 놓던 여성잡지가 사라진 것은 오래고, 스포츠신문에 조중동+한겨례, 경향 정도의 조합을 보이던 신문들은 겨우 1종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가상타 여겨야 한다. 여기까지는 한 단계를 더 거쳐왔다. 신문시장에서 1+1(끼워넣기, 1부는 유가 1부는 무가)이 횡행했을 때는 그나마 보수지+진보지 2종 이거나, 보수지 2종이거나, 진보지 2종이 테이블에 놓였었다. 그랬다가 1+1(끼워넣기) 관행이 깨지면서 겨우 1종이 놓이게 됐다. 사실 신문 끼워넣기는 신문사와 신문을 배달하는 지국의 짬짜미로, 유가부수를 맞추기 위해 서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얌체 짓이어서 단명은 뻔한 것이었다. 그리 대형 미용실에도 잡지는커녕 신문 1부만 놓였어도 감지덕지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라온이 바론이 이발날 미용실을 가서 누구도 들춰본 적 없는 말끔한 신문을 수거해 온다. 물론 직원의 양해를 구하고서다. 직원한테 가져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너무도 좋아한다. 어차피 버려지는 쓰레기라는 속셈이 읽히는 대목이다. 나는 이리 한 달에 한 번 라온이 바론이 이발하는 날짜의 신문만 읽는다. 어제는 3개 기사가 눈에 띄었다. 신경림 시인의 부고기사와 이문열 소설가의 회고록이었다. 또 하나는 데카르트를 다룬 <신복룡의 신영웅전>이란 칼럼이었다. 집에 와 읽은 기사로는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의 ‘나 홀로 사회’ 칼럼이 눈에 들어왔다. 신경림 선생은 생전 “혼자만이 아는 관념의 유희와 말장난으로 이뤄진 시에 대한 반발로 글을 쓴다”고 했다. 만해문학상 수상 소감에서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적 소설 <말테 수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랜 삶의 맨 마지막에 가서야 어쩌면 제대로 된 시구 열 줄쯤 쓸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경험들이다.” 신경림 선생의 시는 그냥 삶의 관조를 읊조린 것이다. 그것이 이전 ‘관념의 유희와 말장난으로 이뤄진 시에 대한 반발’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서 서 있었던 것 같다 (…) 그래서 나는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이런 식이다. 삶이 조금만 영글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법한 이야기다. 아니 시다. 그 시는 그의 경험이고.(계속)/심보통 2024.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