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535-6번지에 가면 조선후기 성리학자 화서 이항로(1792~1868)선생의 생가가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이항로선생이 태어나서 살았던 집으로 약 250여 년 전 선생의 부친이 지었으며 당시 선비의 살림집 모습을 잘 보여주는 전통가옥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유학자 이항로는 세 살 때 『천자문』을 떼고, 여섯 살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뗐으며, 열두 살 때 신기령에게 『서전(書傳)』을 배웠으니 그의 천재성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던 것이다. 일찍 학문을 깨우치고 조선 후기 1808년(순종 8) 17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했으나 당시 권력층들이 과거급제를 구실삼아 자기 아들과 가까이 지낼 것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거장 출입도 수치스럽다며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1840년 휘경원 참봉과 지방 수령 등에 임명됐지만 바로 거절해버리고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다 1866년(고종3)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좌의정 김병학의 천거로 또 다시 동부승지란 벼슬을 하사 받았지만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등 그의 실정에 대해 상소문을 두 번이나 올렸으니 대원군의 노여움을 싸게 되어 그만두고 낙향을 했다. 그는 뚜렷한 스승의 가르침도 없이 독학으로 학문에 전념하여 공자, 주자의 도학을 정통으로 계승하였으며 19세기 서구열강의 침략에 맞서 벼슬을 사양하고 제자를 양성해 화서학파를 이루었다. 화서학파는 항일 의병운동을 주도하게 되는데 주요인물로는 양현수,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유인석 등이 있으며 이들은 바로 이 집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항로는 주리론(主理論)에 바탕을 두고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윤리를 강조해 구한 말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엄격히 구별하고 차등적으로 인식해서 이(理)가 주가 되면 천하가 편안해지고 기(氣)가 주가 되면 천하가 위태롭다고 주장한 학자였다. 그는 1868년 7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생가 뒤편 산자락에 선조들과 함께 묻혔으며 남긴 저서로는 『화서집』, 『화동역사합편강목』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 『벽계아언』12권 등이 있다.이곳의 산세는 화야산(754.2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마을 뒤 현무봉(260m)을 만들고 여기서 남남동쪽으로 내려온 용맥 끝자락에 생가가 들어서 있다. 집 뒤쪽으로는 배산이 있고 마을 앞 개천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굽이굽이 흘러 마지막 북한강에 합류하니 양택의 입지조건인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전저후고(前低後高)를 모두 갖추었다. 또한 집 앞 정면으로는 둥근 금형산의 봉우리가 2개 연속으로 마주하고 있어 집안에 부를 가져다준다. 풍수고전 『靑烏經』에서는 부자가 되는 터는 둥그스름한 봉우리가 금궤처럼 생긴 것으로 집안에 재물이 몰려 들어옴이 마치 냇물이 흘러 들어옴과 같다 하였다. 그러나 집 뒤편에 위치한 그들의 음택지는 이와 대조적으로 경사도가 심해 재물이 곧 바로 빠져 나가는 비혈지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