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장마 예보가 심상찮다. 이 또한 인간이 자연을 함부로 한 과보이니 어쩌랴. 모두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할 뿐. 더불어 불쾌지수에 끌려가지 않도록 마음자리를 살필 일이다.김진현김진현은 자는 내현이고, 호는 병남이며, 본관은 의성이다. 1907년 정미에 산남의진에 따라 마음과 힘을 다하다가 청하에서 전사하였는데, 임시로 청하의 어느 곳에 시신을 묻었다. 그 후 적들이 그의 집을 불태우는 바람에 가산이 온통 잿더미가 되고 그의 아들과 손자는 이리저리 흩어졌다고 세간에 전해지고 있다.〈원문〉金鎭賢은 字乃賢이요 號屛南이요 義城人이라 或言丁未之年에 從軍하야 盡心竭力이러니 戰死於淸河하야 權厝於淸河某地하고 其後敵이 放火其家하야 假山이 盡爲灰燼하고 子孫이 離散云이러라 <山南倡義誌 卷下43p>金鎭賢 義士 略歷(김진현 의사 약력)金鎭賢(김진현)은 字(자)는 乃賢(내현)이오 貫鄕(관향)은 義城(의성)이라 丁未年(정미년)에 入陣(입진)하여 활약하다가 淸河(청하)에서 순절하다 <山南義陣遺史467p>이형표①자는 성범이고, 호는 처우며, 본관은 영양(영천)이다. 고려조 신호위대장군이었던 영양군 대영의 후손으로 대대로 영천에서 살았으며 도천리1)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단아하고 도량이 너그럽고 도타웠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정성을 다하는 섬김과 돌아가신 뒤의 장례와 제사는 한결같이 예절을 따랐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와 늑약을 맺은 이후로부터 나라의 사직이 위태롭고 온 나라가 물 끓듯 하였다. 형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일찍이 비분강개하는 뜻을 품고 널리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다가 산남의진의 거사를 듣고 맨 먼저 연통하고 모의하였다. 산남의진에 남보다 먼저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1906년의 창의(倡義) 때 이한구의 참모로 천거되어 곧 산남의병진으로 나아가 맡은 바 일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와서 한 해 남짓 치병하면서 다시는 산남의진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남몰래 동생인 형윤으로 하여금 널리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죽음을 무릅쓸 의병들을 규합하여 본진(本陣)으로 보내주게 하였다. 또한 군에서 사용하는 물품과 군복 등을 주사산(朱砂山)2)의 주요한 곳에 묻어두고 산남의진으로 운반케 하여 훗날 어려움이 없도록 대비하였다. 산남의진이 적과의 싸움에서 패한 이후로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발자취를 자연 속에 감추었으나 결국 적에게 잡힌 몸이 되어 영천감옥에 수감되었다. 성범이 끝내 적에게 굴복하지 아니하고 적 또한 이형표로부터 실제적인 증거를 찾기가 어려워 마침내 석방되었다. 이후로 채미(採薇)3)와 창랑(滄浪)4)을 노래하다가 얼마 후 죽었다.<원문>李亨杓 字聖範이요 號處憂요 永陽人이라 勝國神虎衛大將軍永陽君大榮之後也라 世居永川하고 生于道川里第하다 性이 雅量寬重篤盡誠孝하야 生事葬祭에 一遵禮節하다 自島夷勒約以後로 宗祊이 岌嶪하고 擧國이 沸騰이라 嘗懷慨然之志하야 廣詢四方而求募同志라가 聞山南義陣之起하고 首先通謀하야 來往不絶하고 誓以不後런이 丙午之倡에 李韓久 以參謀之任으로 薦之하니 卽日赴陣하야 贊畫未幾에 重傷而歸하야 因病歲餘에 不復入陣하고 潛使舍弟亨允으로 廣詢各處하야 糾合死士하야 送之于本陣하고 又以軍用等物及軍服等屬을 儲藏於朱砂山要處하야 運入于軍中하야 備無後艱이러이 自大陣敗後로 知事竟不濟하고 遂遯跡於巖穴타가 爲敵所執하야 繫永獄而終不屈服하니 敵亦難於實據하야 以此釋放하다 自是以後로 歌詠採薇滄浪이라가 未幾而卒하다<山南倡義誌 卷下43~44p>